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cm만 낮았어도 세계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305-BC30)의 마지막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 7세(BC69-BC30)는 독약 같은 아름다움으로 로마 공화정의 두 영웅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미와 색으로 현혹시켜 두 사람 모두 비극적 종말을 맞게 하였다.

또한 당나라(中唐) 천재 시인이며 사회시파(社會詩派)의 거장인 백거이(白居易)는 당나라 6대 황제인 현종(玄宗·685-762)과 양귀비(본명 楊玉環·719-756 )와의 불륜의 사랑을 아름답고 슬프게 노래한 시 장한가(長恨歌)에서 경국지색(傾國之色)인 양귀비(楊貴妃)가 권불십년으로 38세에 생을 마감한 비극적인 종말을 읊고 있다. 안록산의 난에 쫓기어 양귀비와 도망가던 현종이 군사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양귀비를 죽이도록 내어주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와 양귀비가 페르시아 만(灣)에서 생산된 천연진주 가루를 얼굴 화장용으로 사용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주는 장식용에 앞서 화장용으로 먼저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10년대 이전까지 서 호주의 브룸 지역에서 천연산 진주가 많이 생산되어 전 세계 공급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산지였다고 하며 당시 천연진주 채취선이 400척이나 있었고 인구도 지금의 3배인 4만 여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브룸의 천연진주 생산량이 전 세게 공급량의 2%에 불과하나 타이티 진주와 더불어 고급진주 시장을 석권할 만큼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1856년 1월 일본 미에현(三重縣) 도바시의 우동 집 11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미키모토 코기치(御木本 幸吉·1858-1954)는 일본의 전통인 우동 집을 가업으로 승계하지 않고 23세의 나이에 수산업을 시작하였다. 그가 30세가 되던 1888년 진주조개양식에 손을 대면서 일본은 물론 세계 진주양식사를 바꾸어 놓았다. 수 십 번의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처 1893년에 반원진주양식에 성공하게 되고 1905년에는 그의 사위와 더불어 완전한 구형진주양식에 최초로 성공하게 되었다.

본래 진주양식의 역사는 11~13세기 중국 광동에서 담수조개를 이용한 불상형 진주양식이 시작되었으나 상업적으로는 일본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으며 11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키모토 진주가 양식진주의 대명사로 세계시장의 90% 석권하게 되는 역사를 이루었다. 미키모토는 생전에 발명왕 에디슨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미키모토 진주를 선물받은 에디슨은 자기가 연구하지 못한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다이아몬드이고 또 하나는 진주인데 미키모토 진주를 접하고는 “세계의 경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919년 런던 진주시장에 진출한 미키모토 양식진주는 천연산과 비견될 만큼 아름다움을 지녀 대단한 호평을 받았으며, 당시 옥스퍼드대의 제임스 교수는 진주를 만들어 내는 자극물이 자연적으로 발생되는가 인위적으로 발생하는가의 차이일 뿐 미키모토 진주와 천연진주는 차이가 거의 없다고 학술적인 견해를 밝힘에 따라 더욱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한편 우리 한산만의 청정해역에서 양식하는 통영 진주도 역사는 30년으로 일천하지만 그 품질이 우수하여 일본을 바짝 추격하고 있고 국제적 평판도 높다고 한다.

원래 진주는 진주모패(진주조개, 굴, 홍합, 전복 등)에 이물질이 외부로부터 삽입(자연 또는 인공)되었을 때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자 하는 의지가 작동하여 이물질에 대한 방어적 수단으로 자기의 체액을 분비하여 감싸게 되고 그 진한 체액에 수 백 번 둘러싸여 견고하게 응고되는 과정에서 그 귀하고 영롱한 진주가 형성되게 된다. 이와 같이 진주조개는 자기 몸에 난 생채기를 치료하기 위하여 고통을 감내하기를 수년 또는 수 십 년 동안 인내한 결정체인 6월의 탄생석인 진주를 인류에게 선물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어촌과 수산업의 사정은 너무 절박하다. 자원 감소, 치솟는 유가, 선원 부족 등 만성적인 이중고에다가 어가 부채는 매년 증가하고, 농업과의 과세 불균형 시정, 어선원·어선 보험료 지원 확대를 꾸준히 요구하고 있으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 다가 서해에서의 중국어선의 불법조업은 증가하고, 최근 수년간 해파리 때까지 달려들어 연근해 어업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어촌의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됨에도 이에 따른 사회 안전망, 특히 의료시설 부족과 치료비 경감대책 호소에 대한 정부의 종합대책은 느리기만 하다.

최근 천안함을 포함한 일련의 사태에서 보았듯이 쌍끌이, 유자망, 정치망 등과 건강한 어촌사회는 우리 안보의 첨병으로 이번 기회에 수산업의 중요성이 범국민적으로 각인되길 기대한다. 그러나 모진 겨울이 지나면 화창한 봄날이 올 것이라고, 그러니 수산업을 천직으로 알고 더 기다리자고, 진주조개가 주는 고통의 교훈만을 계속 강요하는 것도 이젠 설득력도 없거니와 민망할 따름이다. 누군가 답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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