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해군이다’로 시작되는 해군가는 1946년 1월, 조국 광복 직후 현대 한국 해군을 창설한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여사가 작곡한 행진곡풍의 군가로 60여 년간 대한민국 해군의 자긍심 바로 그 자체였다.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방패/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와 나라... 가슴속 붉은 피를 고이 바치자/ 바다를 지켜야만 강토가 있고/ 강토가 있는 곳에 조국이 있다....

필자도 해군(75기)에 3년 복무했다. 병과가 위생병이어서 함정 근무는 오래하지 않았으나 누구보다도 그 생활을 잘 안다. 전역 후 50여년의 세월이 가까워 오지만 지금도 재경 동기회 모임에 20여명의 노(老)수병들이 아픈 다리를 이끌고 꼭 참석한다. 모임이 끝날 즈음 누구의 선창이 없어도 우리는 해군가를 부르고 눈물을 글썽이고 헤어진다.

우리 일행 중에 갑판병과였던 박상수라는 동기생이 있다. 우리는 전역 당시 계급이 상수(上水) 즉, 상등수병(上等水兵)이었으나 삼군간의 계급장 통일이 이루어져 병장(兵長)으로 제대하였다. 그때 우리는 그게 큰 불만이었으나 박상수는 이름이 상수라 항시 상수라 부르니 모두들 부러워했다. 우리는 해군 정복인 세라복과 청작업복 그리고 말표 단화를 신고 수병(水兵)이라는 갈매기 계급장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리고 항시 선후배간에 사랑으로 똘똘 뭉쳐 오늘날까지 해군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2009년에는 버스를 빌려 진해 통제부(해군훈련소가 있던 통제구역)까지 다녀오고 13주간의 지옥 훈련과 기합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그 시절을 추억했다. 그러나 지난 3월26일 21시22분 PCC 772 천안함에 승조해 있던 46명의 후배 수병들이 불의의 상황을 맞아 심청이가 몸을 던져 부친을 구한 인당수 그곳에 붉은 피를 바치고 조국을 지키다 전사했다니 참으로 자랑스럽다. 그러나 너무나 슬프고 또한 분하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그들을 묵언으로 떠나보낸 유가족들에게 충심으로 위로의 말씀과 하나님의 가호를 빈다.

1805년 10월 21일 영국의 넬슨 제독(1758-1805)이 지휘하는 27척의 영국 함대는 영국 정복의 야욕을 품고 침공한 불란서-에스파냐(스페인) 33척의 연합 함대와 스페인 서남쪽 트라팔가 곶(Cape Trapalga)에서 격렬한 해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불-에 연합 함대는 괴멸되고 8천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2만3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영국 함대에 대패했다. 그후 넬슨 제독은 1794년 코르시카 해전에서 오른쪽 눈을 잃었고, 1797년 빈센트 해전에서는 나폴레옹 군대 저격수의 총탄에 치명상을 입고도 조국 수호 의무를 다한 것에 대해 하나님과 함께한 수병들에게 감사하다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47세의 젊음을 바다에 바쳐 조국 영국의 영웅이 되었다.

선조 25년(1592년)일본은 임진년에 왜란을 일으키고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유린하였다. 1598년 8월17일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왜수군이 후퇴하려 하자 이순신 제독(장군 1545-1598)의 지휘를 받고 있는 조선 수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당포, 당황포 및 한산도 등에서 200여척을 격파한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뒤 그해 11월10일 노량 앞 바다에서 왜선 5백여척 중 450척을 대파한 것은 한국 해전사에는 물론 세계 해전사에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은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훈을 남기고 54세에 유명을 달리 하였으나, 오늘을 사는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성웅 이순신으로 살아있지 않는가?

1941년 일본은 미국이 해군력을 이용하여 자국의 유류 수송로를 차단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국에 대하여 앙심을 품고 있던 중 1941년 12월7일 일요일 아침을 기해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 사령관이 지휘하는 태평양상의 항모에서 출격한 카미카제(新風) 특공대로 하여금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 중인 미국 해군 함정에 대하여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였다.

미국은 예상 밖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막대한 재산과 인명 피해를 입었다. 애리조나(전함 32,100톤)호를 포함하여 7척의 전함이 화염 속에 침몰하였고, 9척(149,675톤)의 전함, 구축함, 순양함이 파손되었으며 188척의 항공기가 전파되었다. 이때 2,403명이 전사하였으며 화염에 휩싸였다가 9분 만에 침몰한 애리조나호에서만 1,177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날을 치욕의 날로 선포하고 국민들에게 잊지 말자고 호소했다. 미국은 애리조나호의 인양을 포기하고 1958년 아이젠하우어 대통령은 그 위에 기념관(USS Arizona Memorial)을 건립하고 흰대리석에 그날 전사한 2,403명의 이름을 새겨 조국을 위해 전사한 그들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오늘날 수많은 국내외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곳 진주만(펄 하버)를 찾고 있다. 일본은 이 진주만 공격이 빌미가 되어 패망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772함 나오라, 부상하라 그리고 수병들은 급히 원대복귀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나 수병들은 대답이 없다. 이젠 조국의 바다와 황금어장을 지키다 전사한 이들의 애국 애족에 우리 산 사람들이 답할 차례다. 우리의 까나리, 꽃게 어장 그리고 북한의 잠수함 기지가 보이는 백령도의 심청각에 흰대리석 기념비를 세우고 이순신 제독의 후예들인 한준호 준위를 포함한 47명 영웅들의 이름을 써넣자.

정부는 해군장으로 전사자로 이들을 예우한다니 참으로 현명한 결정이다. 그리고 이들을 돕다 귀환 중 침몰한 쌍끌이 어선 98금양호의 선원들도 우리 모두 잊지 말자 백령 앞바다 물이 다 마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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