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수산양식업계의 기초를 다지는데 일조한 보람된 일을 과연 하였을까 하고 잠시 뒤돌아보게 하고 있다. 새우양식업의 선구자인 김진호 사장은 한국새우양식협회장도 역임했지만 초창기부터 새우양식을 위한 외길을 걸어오면서 전문 지식을 쌓았고 팔순이 넘는 현재까지도 새우양식 현장에서 뛰고 있는 자랑스러운 수산인이다. 그에게서 뜻밖에 문자 메시지가 왔다.

「선배님. 어떻게 거울을 비춰보듯 글을 쓰셨는지 혜안에 감동하며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모질게 지켜온 인내의 끝자락입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선배님의 무언의 후원덕분이 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날 김 사장은 좌절과 역경을 딛고 양식업계에 우뚝서기까지의 과정을 진솔한 얘기로 한 것뿐이고 오직 마음만 있을 뿐 후원했다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찬사를 들으니 고래도 춤을 추듯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명언집에 보면 가장 멋진 인생은 늘 배우려는 자세이고 겸손한 사람은 성인이 되어도 유년시절을 잊지 않는 사람이며 자신이 처한 현실에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랬다. 그러고 보면 김 사장이 평소에 그런 사람이라 겸손과 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다.

새우양식에 비견되는 송어양식 현장에서 팔순이 넘도록 뛰고 있는 또 한사람 고향친구 함준식 사장도 오랜 인연으로 약 60여년 전인 1965년 미국으로부터 최초로 도입된 송어 종란을 화천에서 평창까지 수송해와 송어 양식에 전념하는 외길 인생도 빼놓을수 없다. 1960년 후반 수산청 내수면과에서 담당했던 필자도 송어 종란을 국내 토착화될 때까지 몇 년간을 미국으로부터 도입하여 김포 비행장에서 통관을 마치고 그 당시 국내에는 덮개차량(봉고)이 없어 미국 원조기관인 유솜에서 차량을 빌려서 생물이 얼지 않도록 안전하게 자정이 넘어서 눈 덮인 산골 평창까지 밤길을 달려가야 했던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어 헌병 백차가 김포에서 서울을 통과하여 경기도 가평까지 호송 안내하는 이른바 「송어종란 수송작전」을 방불케 하였고 평창 도립 양어장에는 종란 인수를 위한 김동수 식산국장과 함준식 양식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실로 어려운 시절에 감당하기에는 가슴 벅찬 기억으로 남았지만 이것 또한 초창기의 지난 날이 보람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무지개 송어는 초창기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국내 토착화되어 자체 생산 단계에 이름으로서 국내 제일 토착화에 성공한 유용한 어종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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