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물 파시의 역사는 초창기에 해산물 유통구조 발달사에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시(波市)의 의미는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풍어기에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으로 물고기를 잡는 어선에서 곧바로 매매가 이루어지므로 어촌은 활기를 띠고 풍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어촌 식당과 술집이 흥청거리고 심지어 길거리에는 개가 돈을 물고 다닌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파시에 대한 기록은 택리지(1751년) 동국여지승람(1530년) 세종실록지리지(1454년)등에 기록된 역사의 기록이다. 한마디로 현대적인 유통망이 확립되기 이전에 파시를 통해서 주요 해산물이 유통된 것이고 물고기잡이가 활발한 곳은 상당한 규모의 어선과 어부가 몰려서 파시가 열렸다.

전국의 호남 3대 파시는 임자도 민어파시, 영광 조기파시, 비금도 강달어 파시가 있었고 그 외에 나라도 삼치파시, 부산대변 멸치파시, 욕지도 고등어파시, 울릉도 오징어파시가 유명했다. 파시가 열리는 해산물 유통구조는 어떠했을까. 어선에서 물고기를 잡으면 주변에 대기하던 장사배가 어획물을 바다에서 구매하여 포구로 실어나르며 어물전의 객주는 해산물을 사들여 건조시키고 염장을 해서 다시 어물전으로 보낸다. 해산물은 주로 조기, 삼치, 준치, 멸치를 연안 또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등 수로를 통해서 한양, 개성으로 보냈고 동해안 명태는 소달구지 말을 이용해 육로로 운송하였다.

이렇게 운송된 해산물은 소매상 중간상인 행상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확산 유통된 것이다. 그중에서 욕지도의 파시를 보면 통영에서 뱃길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섬 욕지도의 고등어 파시는 1920년부터 어선 500척 운반선 290척이 고기잡이 배에 투입되었을 정도로 대규모 고등어잡이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고등어떼가 점차적으로 제주도 남부 먼바다로 이동하고 유통구조 방식이 부산공동어시장으로 고등어가 집결되므로 1960년부터 파시촌은 쇠퇴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을 방문한 어느 연구사에 의하면 쇠퇴한 그 지역이 횟감 고등어 생산지로 변모했다고 한다. 주변에 고도리라 칭하는 100~150g의 고등어 새끼를 수집하여 중간종묘로 해상 가두리에서 축양으로 1년 동안 키워서 고가로 판매된다고 한다. 원래 고등어는 성질이 급해서 바로 죽기 때문에 활어 상태로 운송이 불가능하므로 고등어회는 식도락가와 일본인에게 최고로 인기 있는 횟감이므로 산지에서 활어 또는 선어 상태로 고등어 횟감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음은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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