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어류와 관련된 칼럼을 쓸 때는 어류박물지를 참고 한다. 이 책은 지금은 작고하신 정문기(鄭文基) 박사가 1974년 펴낸 책이다. 고 정문기 박사의 역작으로는 <한국어도보, 韓國魚圖譜>, <조선어명보, 朝鮮魚名譜> 및 <한국어류생태학, 韓國魚類生態學> 등과 역서로 <자산어보>가 있다. 이 외에도 19세기 전반에 연이어 나온 김려(金鑢)의 <우해이어보, 牛海異魚譜>, 정약전(丁若銓)의 <玆山魚譜> 그리고 서유구(徐有榘)의 <佃漁志> 자료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고 정문기 박사는 <어류박물지, 魚類博物誌>를 편찬하면서 최초의 한자 상형문자(象形文字)는 물고기 ‘魚’자라고 추정함과 동시 한자(漢字)의 기원이라고 믿었다. 인류가 태어난 원시시대에 의(依). 식(食). 주(住)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먹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농경사회가 시작되기 이전이므로 인류는 당연히 강이나 하천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창세기(1:21-)에도 물고기를 먼저(다섯째 날) 만들고 다음날(여섯째 날)에 사람을 만들어 다스리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정 박사는 중화권의 석학들과의 접촉 및 문헌의 입수를 통하여 그 믿음이 확고해졌다고 한다. 여기에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상형문자, 은대의 갑골문, 주대의 금석문, 진(秦) 한(漢) 위(魏) 진(晉)의 글꼴 그리고 현재와 같은 당, 송 대의 ‘魚’자 까지 변천과정을 조사했다. 이와 함께 물고기 잡을 어(漁)자는 물고기 세 마리가 주낙에 걸린 데서 유래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고문헌에는 갑골문자가 발달하여 오늘날의 한자가 되었고 그 원칙 6가지만 특정하고 있다. 그것은 상형(모양), 지사(추상적), 회의(기존 한자의 합성), 형성(뜻), 전주(비슷한 뜻), 가차(외래어 차입) 등으로 특정 한자의 기원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다.

<우해이어보>는 김려가 1801년 진해로 유배된 뒤에 물고기와 어패류를 관찰하여 1803년에 지은 것이다. 여기에서 우해(牛海)는 진해의 별칭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이다. 이 어보에는 진해 연안에 서식하는 어류 53종, 갑각류 8종, 패류 11종의 명칭과 습성 등이 기록되어 있다. 명칭이 ‘이어(異魚)’인 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종류를 기술하고 있다. 김려는 유배지에서 어민들과 같이 현장을 답습하고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정약전의 <자산어보> 역시 새로운 문물을 가지고 온 신부 이승훈과 함께 천주교 포교활동으로 촉발된 신유사옥(辛酉史獄)과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흰 비단에 적은 밀서)사건으로 신지도에 이어 흑산도에서 14년간의 유배생활 중 1814년경에 지은 작품이다. 흑산도 근해의 해양생물 226종의 명칭, 크기, 생태 등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역작이다. 그럼에도 <자산어보>는 정약전의 독자적 연구가 아니라 선비 청년인 정덕순(鄭德順)과 공동으로 연구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자산(玆山)’의 독음을 ‘자산’으로 읽어야 하는지 ‘현산’으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전어지>는 서유구가 1820년경에 지은 <난호어목지, 蘭湖魚牧志>를 근간으로 편찬하였으며 민물어패류 55종, 바다어패류 78종, 미상의 어패류 21종의 명칭, 형태, 습성 그리고 이용방법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난호어목지>는 <자산어보>와 저술 시기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 비해 <전어지>는 약20년 후대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전어지>는 아들 서우보(徐禹輔)가 교정 편찬에 참여하면서 보다 정확하게 수정 및 변경되었다고 한다. <전어지>는 오사카본, 고려대본, 규장각본 등이 현존 한다. 전어(佃漁)는 사냥과 어로를 의미한다. 권1과 2에는 목축, 양어, 양봉. 권3은 사냥과 고기잡이. 권4는 물고기 이름을 고찰하고 있다. 앞에 언급된 3가지 어보는 조선시대 3대 어류전문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어종들만을 나열하고 있을 뿐 서로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에 대한 비교분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아쉽다. 그 밖에도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익(李瀷)의 <성호사설, 星湖僿說>, 1614년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인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 芝峯類說>, 조선 최대의 백과사전으로 전통문화를 집대성한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 세종의 치적을 적은 <세종실록, 世宗實錄> 지리지, 1530년에 편찬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의 토산조, 유중림(柳重臨)의 <증보산림경제, 增補山林經濟>, 조선 후기 학자인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 松南雜識> 등에도 어패류에 대한 고증들이 다수 실려 있어 오늘날 어패류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반면 지금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옛날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 높은 전문연구보고서가 나오고 있다. 물고기 ‘魚’자 하나만을 두고도 번뇌했던 정문기 박사님 같은 열정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필자가 과문한 탓일까.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처음 사용한 글자를 아는 분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지금 200해리 신해양법시대에 살고 있다. 국익에 도움이 되고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는 연구자들의 분발을 보고 싶은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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