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필자는 지금까지 민물매운탕을 먹은 본 적이 없다. 선입감이 민물고기는 비린내가 날 것 같아서다. 어린 시절 ‘남대천’이라는 냇물에 동네 형들과 통발을 놓고 물장구치는 게 즐거웠다. 된장 한 숟가락을 넣고 놀다가 얼마 후 물속의 유리 통발을 들여다보면 형형색색의 민물고기가 탈출하려고 발버둥 치는 게 애처로웠다. 피라미를 위시하여 모래무지와 딸치(쉬리) 등이 한 가득이다. 동네 형들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된장을 찍어 입속으로 직행한다. 깨물면 얼마나 아플까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좌우로 몸부림치는 피라미는 순식간에 입안으로 사라진다. 지난 3월말 경기도 여주가 고향인 지인의 안내로 용기를 내 민물매운탕 집을 찾아갔다. ‘굴암매운탕’ 집골목어귀에는 벤츠를 비롯한 고급 외제승용차가 줄지어 서 있다. 이곳은 남한강 자락에 위치하여 시원한 강줄기가 보일 듯 말듯 한 매운탕 집이었다. 집은 허름하나 예약된 쏘가리, 메기에 붉게 양념한 얼큰 매운탕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외국에 살다가 잠간 다니러 온 손자 녀석도 민물매운탕은 먹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석양빛과 같이 붉게 물든 국물 한 모금을 입에 떠 넣는 순간 놀랐다. 해산물 매운탕보다 깊은 맛이 나고 비린내가 없었다. 민물새우를 듬뿍 넣어 국물을 진하게 우려낸다는 민물매운탕 예찬론자인 일행의 설명이다. 한 시간여 여주쌀밥에 매운탕을 먹고 나니 괜히 겁먹은 자신이 무안해졌다. 다시 오자는 일행의 말과 함께 밖으로 나오니 쨍하던 하늘에서 때 늦은 함박눈이 쏟아진다.

경기도 여주는 전체가 역사박물관과 같은 곳이다. 봉미산 자락에 위치한 신륵사(神勒寺)에 들리기로 했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고증이 미흡하다고 한다. 천년고찰인 신륵사는 조선 성종 때 영릉의 원찰로 삼아 ‘보은사’라 부르기도 한다. 함박눈이 시야가 보이지 않는 진눈깨비로 변하여 사찰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명성왕후(明聖王后, 閔妃)의 생가로 행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乾淸宮)을 일본 낭인들이 기습하여 고종의 황후인 중전 민씨(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를 참혹하게 살해 후 화장했다. 1895년 8월20일 일본의 공권력(三浦梧樓-미우라 공사 등) 집단이 자행한 황후시해 사건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명성황후시해는 당시 고종을 10년간 섭정했던 흥선대원군이 배후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개화정책을 주장한 반면, 쇄국정책을 고집한 대원군이 친일파와 공모했다는 것이다. 또한 중(淸), 일, 러 3국간의 내정간섭과 힘겨루기가 극심한 때이기도 했다. 특히 이 사건으로 항일 의병 봉기의 원인이 되었으며,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한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1896년 청년 김창수(金九의 初名)의 독립운동 투신 원인이 되었고, 1909년 안중근 의사(109주기)가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명성황후인 민비는 1851년 경기도 여주의 여흥(驪興) 민(閔致祿)씨 가문에서 태어나 8세까지 그곳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이 후 부친의 사망으로 모친과 함께 서울의 감고당(感古堂-仁顯王后의 친정)으로 이주하여 성장한 후 16세에 고종의 비가 되었는데 매우 지적이었다고 한다. 일행 중 한분은 어릴 적 민비 생가에서 뛰어 놀았다고 하며, 그 집 다락에서 목이긴 놋쇠숟가락을 찾은 기억도 생생하다고 한다. 반면 진눈깨비는 그치지 않아 역사의 현장인 민비생가 방문마저 후일로 미루게 했다. 귀가하는 중 세종대왕릉 방문에 희망을 걸었으나 이마저 허사였다. 1418년 왕이 된 세종대왕은 유교정치 토대 마련, 편찬사업 융성, 과학기술 발전, 법전 정비 등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로 오늘날 지구상 문맹률 최저의 일등국가가 되는 초석을 놓았다. 1000년(고려 초)의 역사를 지녔다는 여주도자기(현 600개소)단지 견학도 건너뛰었다. 여주의 민물매운탕은 남한강변을 따라 서식하는 싱싱한 민물고기를 이용해 끓인다. 민물매운탕은 맛으로 승부를 내야 하는데 그 맛은 싱싱한 원재료에 달려 있다. 남한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중간 상인들을 거치지 않고 단골매운탕 집에 직접 공급된다. 신선도가 높은 쏘가리, 메기, 동자개(빠가사리) 등 고급 어종만을 고집하는 집도 많다고 한다. 한편 얼큰한 매운탕의 진수는 오래 묵힌 고추장에서 비롯된다는 주인의 코멘트다. 대부분의 여주 민물매운탕 집은 20여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오래된 고객이 많다. 여주에서 민물매운탕이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여주 쌀밥과 궁합이 잘 맞기 때문이다. 매운탕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매운탕이 끓기 시작하면 먼저 국물과 수제비를 먹은 후 양념이 배인 매운탕 고기를 쌀밥과 같이 먹으면 일품이다. 여주는 옛날 남한강에 띄우는 배(驪州船)가 교통의 주요 수단이었다. 동시에 많은 배들이 고기잡이를 생계수단으로 삼은 것이 여주 민물매운탕 탄생의 역사가 되었다고 한다. 날씨가 원망스러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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