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방어는 개도 먹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살이 푸석푸석하고 맛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겨울철 방어는 한(寒)방어라 하여 맛이 있고, 버리는 부위가 전혀 없는 생선이다. 방어(yellow tail)는 11월부터 기름기가 오르기 시작하여 다음 해 2월까지 맛이 절정에 이른다. 방어(魴魚, 肪魚,方魚,)는 겨울철 추운바다에서 견디기 위해 지방을 축적하기 때문에 방어 뱃살의 맛은 참다랑어(Bluefin Tuna)나, 황새치(Sword Fish)의 뱃살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방어는 머리가 커서 수율(收率)이 떨어지는 생선이나 머리구이는 별미로 소문나 있다. 대방어의 내장은 양이 많고 식감도 좋아 국을 끓여 먹으면 일품이다. 일본에서는 부리(鰤, 80cm이상) 또는 하마치(魬, 60cm이상)라고 하고, 관서지방에서는 방어새끼를 이나다(いなだ, 마래미)라고 부른다. 중국은 팡위(魴魚, fangyu), 스위(鰤魚, shiyu)라고 쓴다. 동해의 영덕지방에서는 10cm(곤지메레미 또는 떡메레미), 30cm(메레미 또는 되미)라 하고, 60cm 넘어야 방어라고 부른다. 또 중량에 따라 소방어(2kg내외), 중방어(4kg이하), 대방어(5kg이상)라 하고, 지역에 따라 특대방어(8kg이상)라 칭하는 곳도 있다.

일본은 80cm(지방에 따라 차이)가 넘어야 부리(ぶり)라고 하는데 ‘부리(鰤)’는 기름을 뜻하는 ‘아부라(油, 脂)’에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방어는 기름이 올라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생선이기도 하다. 특히 붉은 살 생선으로는 참치 다음으로 치고, ‘카이세키(懷石, かいせき)’ 고급요리에는 방어가 빠지지 않는다. 제주도의 모슬포 토박이들은 한라산에 눈이 두 번 내려야 맛이 든다고 여긴다. 방어는 잡은 지 4∼8시간 정도의 숙성시간을 거쳐야 하고, 다시마에 싸서 숙성시키면 감칠맛이 배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육질의 단백질이 분해되면서 만들어지는 아미노산은 감칠맛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방어의 육질을 구분하면 등살과 뱃살로 나눈다. 뱃살의 맨 밑 부위는 ‘배꼽살(횡경막)’로 부르는데 운동량이 많아 단단하면서도 기름기가 많아 쫄깃한 식감과 기름진 방어 맛을 즐길 수 있다. 반면 가장 비싼 부위는 머리 밑과 뱃살이 만나는 곳에 있는 ‘가마살’이다. 기름기가 많은 탓에 참치의 ‘뱃살(おとろ、오도로)’ 같이 살살 녹는 맛이 일품인 부위다. 뱃살과 등살 사이에 있는 ‘사잇살’은 ‘혈합육(血合肉)인데, 제주 토박이들이 즐겨 먹는 부위라고 한다. 소의 간처럼 붉고 부드러운 식감이 난다. 눈 밑의 ’볼살‘은 양이 얼마 되지 않을 뿐더러 쫄깃한 맛 덕에 방어 마니아들이 좋아한다.

세종 때 편찬된 <경상지리지, 1425>에는 방어가 동평현(東平縣)의 토산 공물조에 실려 있고, <세종실록지리지, 1454>에는 동래현의 토공조에 기재되어 있으며, 함경도 몇몇 지방의 토산조에도 실려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상도, 강원도 및 함경도 각 지방에 방어가 들어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37년(세종 19년)의 호조(戶曹)의 보고 가운데 강원도 주산어류를 열거한 것이 있는데, 방어는 대구 및 연어와 함께 함경도, 강원도에서 가장 많이 나는 물고기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서유구(徐有榘)의 <난호어목지>에는 방어는 동해에서 나는데 관북, 관동 연해와 영남의 영덕, 청하 이북에 모두 방어가 있다고 하고, 큰 것은 6∼7자에 달한다고 하였다. 또한 살빛은 정적색(正赤色)이나 염장하면 담적색이 나며, 소아가 과식하면 체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어가 남획되기 이전에는 그 자원이 매우 풍부하였다.

일본의 한반도 어장개척 기록인 <조선통어사전>에 의하면 동해안에서 가을에 멸치 떼를 좇아 해안에 접근하는 방어 떼는 너무 커서 멸치를 잡으려다 방어 떼의 방해를 받은 때도 있었다고 했다. 또 <한해통어지침>에는 일본인들과는 달리 조선인들은 방어를 즐겨 먹지 않은 탓에 한반도 전역에 방어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1920년대로 들어서면서 생산량이 급증하여 1924년에는 약 6,000톤이 잡혀 일제 강점기간 중 최고 기록을 세웠으나 이후 점차 자원이 감소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일본에서는 급증하는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방어양식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의 지역음식을 기록한 <도문대작(廜門大嚼, 1611)>에는 방어는 동해에서 많이 나지만 독(毒)이 있어 임금에게는 올리지 않았다고 앞의 토산조, 공물조와는 상이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유인즉 방어는 기름기가 많은 탓에 당시의 냉동, 냉장의 유통 방법이 발달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궁중에 도달할 쯤에는 이미 상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응희(李應禧, 1579∼1651)가 쓴 <옥담시집(玉潭詩集)>의 ’방어‘라는 시(詩)에서 ’방어는 몸집이 매우 큰데/ 한척은 넘고 한길은 못되지/ 물 밖에 나오면 검은 빛이요/ 속을 가르면 붉은 빛 선명하지/ 살이 두꺼워 구워도 잘 안 익고/ 기름기 많아 먹기에 좋지 않네.‘ 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방어의 진가를 모르고 고래와 함께 기름 제조 원료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20세기 초.중반의 조리서인 <사계(四季)의 조선요리, 1935>에도 요즘과는 달리 방어 회(膾)가 아닌 찌개만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만 해도 회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흔히 방어 사촌으로 불리는 ’부시리‘와 ’잿방어‘가 있는데 방어 철이 아닌 시기에도 방어로 유통되기도 한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 겨울 방어라 했다. 소나무향이 짙게 배어있는 방어의 배꼽살 한 조각을 고추냉이 살짝 찍어 혀 위에 올려놓으면 올 겨울 내내 행복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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