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목선 한 척으로도 내일을 꿈꾸는 만리포 사람들 그 겁센 팔뚝으로 붉은 해를 건진다. 천 년 전에도 바다는 쪽빛이었다. 시인 박미라님이 쓴 ‘만리포 연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충남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에 위치한 만리포는 과거에는 어항이고 교역항이었으나 현재는 해수욕장으로 더 유명하다. 만리포의 옛 이름은 ‘만리장벌’이다. 조선조 명나라에 사신을 환송할 때 수중만리(水中萬里)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환송식을 했던 곳이다. 이 환송식을 했던 해변의 수중만리에서 ‘만리’란 말을 따 만리징벌이라 하다가 만리포 해수욕장이 개장한 1955년부터 ‘만리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모항리 포구 주변에 펼쳐진 해안의 길이가 만리에 이른다고 하여 이름이 유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해안선의 길이가 2km에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만리란 절대적 수치의 개념이 아니라 북쪽에 연접해 있는 천리포(막동), 백리포(방주골), 십리포(의항리), 일리포(구름포)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크다는 뜻으로 만리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세종 때에 두 정승(황희와 맹사성)이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면서 이곳에서 환송식을 겸한 백일장을 열었다고 한다. 당시 맹 정승은 황 정승에게 ‘하늘이 무척 높지요, 저 높고 높은 구만리(九萬里) 장천(長天)에 떠있는 별이 몇 개나 되겠소’하고 물으니 황 정승이 답하기를 ‘대감 앞바다가 넓지요, 이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간 사신 수는 얼마이며 그 사신들의 혜일 수 없는 희로애락은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답했다 한다. 이 광경을 본 옆에 있던 한 선비가 십리 아니 백리, 천리, 만리에 이르는 백사장의 모래수를 아시는 지요라고 묻자, 두 정승이 대답하기를 모래사장이 십리에 이른다면 큰 암석 열 개가 부서진 것이고, 만리로 보인다면 암석 만개가 부서진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답 한데서 그 이름이 유래 되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조선조 말엽 풍수지리에 밝은 이지영이라는 지관이 이곳을 지나다가 모래밭에 쉬면서 여기에는 앞으로 만호(萬戶)의 집이 들어선다고 만리장벌의 번영을 예언한 바 있다고 한다.

대천, 변산 해수욕장과 더불어 충남 3대 해수욕장이라 불리는 만리포는 바다 조망과 붉은 낙조가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해수욕장이다.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로 시작되는 ‘만리포 사랑’이라는 가요가 마산 출신인 반야월 님에 의해 작사 되어 정서가 실제와 다르다는 지적도 있었으나, 1958년에 탄생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만리포는 광화문을 기준으로 하는 대한민국 서쪽 땅 끝인 정서진(正西津)이기도 하다. 인접 천리포의 어막(魚幕)에서 연유된 막동(幕洞)의 조기와 밭고개 꽃게 그리고 모항의 해삼과 전복은 예로부터 이곳 특산물이고 해상으로 8km거리에 갈매기 번식지인 난도가 있다. 특히 모항 앞바다에서 잡히는 붕장어(あなご)와 놀래미는 이곳을 찾는 조사(釣士)들을 즐겁게 해준다. 또한 만리포는 지리적으로 중국과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 양국 간 교역이 활발했던 곳이며, 중국 무역선은 참깨를 싣고 와서 계란 한 줄과 참깨 한 말을 맞바꾸어가는 물물교환도 했던 곳이다. 가끔 중국선박이 입항 중 난파를 당하면 중국 배로부터 흘러나온 참깨가 항구를 가득 매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만리포가 항구로서 큰 역할을 한 것은 선조의 임진왜란 때에 포구 주변에 소근포진영(所斤浦鎭營)을 설치했는데 이것은 왜구를 막기 위한 첨절제사영(僉節制使營)이었다. 여기에는 3백 여 명의 군졸, 전선 3척 그리고 사후선(伺候船) 3척 등 방대한 조직을 가지고 당진포와 파지도(波知島)까지를 관할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만리포는 개항이후 비교적 거센 외부의 도전 없이 성장했고, 해방을 맞으면서 남한 최대의 해삼, 전복 어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해방 전부터 제주도에서 10여명의 해녀가 이주하여 개발된 해삼, 전복 어장은 6.25 직전까지 무려 30여명이 집촌을 이룰 정도로 발전했다. 연안에 해삼, 전복자원이 넘쳐나다 보니 바다에 인접한 보리밭에도 해삼, 전복이 기어 올라온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제주도 해녀들은 계약이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지역민과 결혼했다. 당시 포구 내에서 부를 이룬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들 해녀들과 결혼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6.25 한국전쟁은 이 같은 만리포의 풍요를 그냥두지 않았다. 한 척의 선주에 약 15명의 해녀들이 조업하여 부를 구가하던 이곳에도 전쟁의 참화가 덮쳐 충남관내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대 들어 다시 백리포를 중심으로 어업이 되살아나고 만리포해수욕장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무동력선 10여척으로 다시 일어선 만리포 어민들은 ’70년대 뜻하지 않은 꽃게어장이 개발되어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꽃게가 일본으로 수출되면서 30여척의 꽃게잡이 어선이 당시 약 50여 억 원의 수출실적을 거양했다. 특히 꽃게 어장이 인근 안흥항보다 1시간 이상 가까워 매우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 반면 선착장, 물양장 등 양육시설 미비로 인천이나 목포등지의 대형어선이 입항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컸었다. 한편 해수욕장으로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어항으로의 기능이 축소되었고 교역항으로 기능은 완전히 상실했다. 만리포가 주변 천리포의 닭섬과 미국계 귀화 한국인인 고(故) 민병갈(2002, Carl F. Miller)씨가 개발한 1만5000여종의 식생이 자리 잡고 있는 수목원과 그리고 백리포의 싱싱한 횟감과 꽃게가 연계 개발될 때 옛날의 영화를 찾기는 어려울지라도 최소한 태안 8경중 하나인 만리포해수욕장(어은돌해변, 파도리해변)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넙치와 우럭(볼락) 회를 비롯하여 붕장어(あなご)석쇠소금구이는 물론 꽃게탕을 즐기는 추억의 명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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