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금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군산항은 청일전쟁 이후인 1899년 5월 개항하였고 군산창을 중심으로 한 부근 지역의 미곡집산지 역할을 했다. 특히 군산포영을 중심으로 한 군사. 통신기지로 조선 3대 시장의 하나였던 강경과 연결된 하항으로서 구실을 한 군산항의 득세도 장항항의 쇠락을 불러왔다. 장항은 백제시대에 설림군(舌林郡)에 속한 갈대밭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가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당(唐)및 왜국(倭國)과의 교역이 번창함에 따라 많은 선박의 기항지가 되면서 차츰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장항항은 백제의 한을 품은 채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당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義慈王)을 속절없이 바라만 보아야 했던 통한의 항구이기도 했다. 장항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로 여기에 지벌포(只伐浦)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지벌포가 장암포(長巖浦)이고 곧 장항항이라는 것이 사가들의 견해이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자주 침범하는 왜구를 무찌르는 전방의 포영(浦營)구실을 했고, 고려 말엽인 우왕(禹王) 6년(1380년)엔 왜구의 병선 5백 척이 침범하였으나 부원수 최무선(崔茂宣)제독이 100여척의 함선으로 왜구를 완전히 소탕한 ‘진포대첩(鎭浦大捷)’도 이 부근이다. 이조시대에는 충청수사영(忠淸水使營)의 서천군 만호영(萬戶營)이 되어 충남의 남단해상을 지키는 보루가 되었었다. 또한 고려 무신 이성계가 부여 흉산성 최영장군의 휘하에서 파견돼 왜구의 침략을 무찌른 첫 전승지로 ‘장암포 전투’가 전사에 기록된 곳도 장항이다. 현대사에서도 장항은 6.25동란 중 인천상륙작전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위장함포사격에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갯벌의 하나임을 자랑하는 서해는 예로부터 다양한 어족자원이 있는 황금어장이었다. 서해어장의 중심에 있는 서천은 금강하구 갯벌을 끼고 있어 기수역(汽水域, brackish water zone)을 오르내리는 각종 어군과 패류 등이 많이 잡혔다. 국내외어선 3,000여척이 드나들었고, 홍어, 조기, 갈치, 민어, 도미 등 어종도 다양했다. 1939년 11월 26일자 동아일보에 장항은 어항인 바 수산업 경영자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 지방유지 10여분의 발기로 ‘장항수산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고 하여 전국에서 일찍이 기업규모의 수산경영회사를 만들만큼 수산업을 선도한 곳이었다. 그러나 1986년 부사방조제와 1991년 금강하굿둑 완공으로 패류 체취가 급감하였으며, 여기에다가 군산산업단지 조성과 2006년 완공된 새만금 방조제는 동진강과 만경강으로부터 유입되는 영양염류를 차단하여 서천 인근 어장의 환경을 변화시켰고 황폐화를 가속시켰다. 그럼에도 장항항은 내항의 기능과 회(膾),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서천에서 잘 잡히는 꼴뚜기와 갑오징어를 주제로 꾸준히 꼴갑축제를 개최하여 옛날 장항항의 영화를 되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수산업 진흥과 항구로서의 기능을 재정립한 장항항으로 거듭날 방향을 모색하고 있고, 여기에 ‘서천수협’과 ‘서천어민회’가 있다. 장항항은 당의 침공과 일제강점기를 거친 근.현대사의 슬픈 역사의 현장임을 침묵으로 증언한다. 옛 영화를 복원하고 진한 갯내음이 가득한 풍요한 바다를 되살리는 노력에 정부가 힘을 보탤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