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이라고 부르는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1976년)은 10년 동안 지속되어 중국을 대혼란에 빠트렸다. 문화라는 말이 붙어 있지만 문혁의 성격은 정치적 비중이 컸다. 중국인에게 있어 문혁은 재앙 또는 재난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만약 문혁이 없었다면 중국의 현대화는 더욱 빨랐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오늘의 중화민국을 있게 한 건국의 아버지라고 추앙받고 있지만 그의 과오 또한 크고, 그의 부인 장칭(江靑)을 위시한 사인방(四人幇, 王洪文, 張春橋, 江靑, 桃文元)의 불순한 극좌세력의 음모에서 문혁이 비롯되었다는 게 일반적인 관점이다.

문혁의 발생은 건국 이후 국제적 고립, 소련과의 관계 악화, 인도와의 국경 분쟁 심화, 월남전과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국외적인 상황과 국내적으로는 건국 이후 시행된 차별적인 계급 정책(출신성분이 좋은 紅五類와 그 반대인 黑五類)으로 대중들 사이에 누적된 갈등에다 당시 실용주의 노선을 취했던 류사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등의 세력이 권력의 핵심에 있었고, 반면 1950년대 말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펼쳤던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 수천만 명의 아사자(餓死者)를 낳고 실패하자, 상대적으로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나 있던 마오쩌둥은 다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이러한 국내외 배경과 대중의 갈등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공산당 내에서 세력을 잃었던 마오쩌둥과 급진파들이 차선으로 택할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문학과 예술이기 때문에 문학 영역에서부터 혁명의 씨앗을 키웠다.

1965년 야오원위안(姚文元)이 신판역사극 ‘해서파관’에 대한 비평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행동에 돌입했다. ‘하이루이바관(海瑞罷官)’은 명(明)나라 때의 청렴한 관리 ‘해서(海瑞)’의 이야기를 오함(吳怯)이라는 극작가가 현대적으로 해석한 경극(京劇)인데, 이들은 이것을 봉건지배계급의 죄악을 은폐하고 수정주의 노선을 전파하려는 악의적인 의도에서 독초(毒草)라고 비판하고, 그 이면에 자본주의를 부활시키려는 반동세력이 존재한다고 공격했다. 이어서 이들은 1966년 2월 상하이에서 군부의 린바오(林彪, 1971년 쿠데타 모의가 발각되어 도주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의 지원 아래 마오쩌둥의 부인인 장칭이 ‘기요(紀要)’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기요에는 문혁 이전의 문예 성과를 완전히 부정한 것으로 건국 이후 문예계가 마오쩌둥 사상과 대립되는 반사회주의적 노선인 흑선(黑線)에 지배되어 왔다는 과격한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1966년 5월 16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문혁의 강령인 ‘5.16통지’가 발표되면서 문혁은 시작되었다. 같은 해 8월 마오쩌둥은 공산당 내에서 반동적 자산계급의 길을 걷고 있는 일부 지도자 즉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타도할 것을 선동했다. 이어서 수십 만 명의 ‘홍위병’(紅衛兵, 마오쩌둥의 부대이름에서 따옴)을 텐안먼(天安門)광장에 모아놓고 모든 기존 권위에 대해 비판하고 도전할 것을 선동했다. 그 결과 마오쩌둥과 급진세력들은 정권을 탈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후로는 내부갈등과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된 홍위병들을 통제할 수가 없어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게 되고, 대중은 사회혼란에 염증을 느끼고 경제의 침체까지 겹치면서 문혁은 더 이상 추진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과 ‘양판희(樣板戱)’라고 칭하는 혁명 현대경극을 주도한 장칭(1991년 재판도중 자살) 등 사인방이 체포되면서 10년에 걸쳐 지속된 광란의 문혁은 많은 후유증을 남기고 막을 내렸다. 홍위병이 주도한 자아비판과 인민재판, 그리고 가혹한 숙청과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류사오치(1969년 河南省 開封 감옥에서 사망, 1980년 복권)나 덩샤오핑(1980년 집권)정부, 학계, 문화예술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해온 대부분의 인물은 외양간(牛棚)에 구금되거나, 하방(下放)에 처해져 산간 농촌이나 광산촌 등에서 오랜 세월을 무자비한 노역에 시달리며 죽거나 견디어야 했고, 피살당하거나 자살한 수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지난 6월 27~30일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과 관련하여 시진핑(習近平)주석의 하방이 화제가 되었다. 시진핑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공신의 한사람인 시중쉰(習仲勳)의 장남이고, 부친은 중국 공산당 8대 원로 중의 한분이었으나, 문혁 전인 1962년 소설 ‘류즈단(劉志丹)’의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반당분자로 몰리면서 당 내외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게 되고,  1962-1978년까지 16년간 농촌의 노동자로 하방되었다. 따라서 시진핑은 16세의 젊은 나이에 학습을 포기(2002년 칭화대에서 법학박사 학위 취득)하고 강제로 농촌으로 하방하게 되었다. 씨뿌리기, 인분퍼나르기, 석탄캐기, 제방쌓기 등 빈곤과 고통 그리고 토굴집에서 빈대와의 동거생활을 통하여 피멍이 들어가면서도 농촌을 배우고 노동자와 혼연일체가 되어 땅이 주는 혜택, 현장체험을 통한 행정과의 괴리 그리고 하층민과의 화합을 배워가며 7년 동안의 하방생활에서 온갖 체험을 통하여 자신을 단련하고,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키우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다고 한다.

현재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노선 채택 이래 시 주석도 같은 노선을 추구하며, 13억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물고기의 씨를 말리는(竭澤而漁)’식의 무모한 경제발전을 지양함과 동시에, 부패는 파리에서부터 호랑이까지 때려잡는다는 결연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시 주석이 체험한 하방의 교훈이고 통치철학인 것이다. 우리의 위정자들은 이 지도자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박근혜 대통령도 부처 간의 벽을 허물고, 현장 확인을 통하여 창조경제의 발목을 잡는 손톱 밑의 가시를 뽑으라고 하지 않는가?
 

저작권자 © 수산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