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생 멜 깁슨(Mel Gibson)은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감독이다. 그는 뉴욕에서 태어났으나 1968년 기관사이던 아버지가 큰 부상을 입고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호주로 이주하여 그곳 시드니에서 고등학교와 예술대학을 마쳤다.

그가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것은 ‘리셀 웨폰 1.2.3.4’에서 형사 역을 맡아 열연하였으며, 1996년에는 ‘브레이브 하트’로 아카데미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최우수 작품상과 최우수감독상을 포함하여 5개 부문에 걸쳐 수상하여 명감독 반열에 올랐다.

그런 그가 2006년도 ‘새 출발’, ‘계시’라는 뜻의 아포칼립토(Apocalypto)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선보였다. 영화에는 멕시코 및 과테말라의 정글에 살았던 석기문명의 마야(Maya, 인디오)족이 등장한다. 멧돼지를 사냥하고 낚시를 즐기며 정글에서 일용양식을 얻지만 평화롭게 살고 있는 어느 날 새벽 청동기문명을 가진 또 다른 마야인 들이 부락을 습격하고, 아이들과 여자는 무차별 살육하고 건장한 남자만 노예와 태양신에게 제물로 받치기 위하여 대나무로 굴비 역듯이 손을 묶은 채로 끌고 간다.

이 때 ‘표범 발’이라는 이름의 젊은이는 재빨리 만삭의 부인과 어린 아들을 깊은 우물에 숨겨놓지만 자기는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화살을 맞은 채 혼자 도망치는데 성공한 표범 발은 자기가 살든 정글로 탈출하면서 무섭게 추적하는 ‘부싯돌 하늘’ 이 이끄는 추격자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부락민들의 복수를 해 나간다. 무사히 자기부락으로 돌아온 표범 발은 우물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아이와 큰 아들 그리고 부인을 구조해 낸 것도 잠시, 바닷가에 함포를 장착한 웅장한 함선(스페인)이 떠있고 총을 든 사내들이 육지로 노 저어 오는 것을 보면서 더 깊은 정글로 부인과 아이를 데리고 떠나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는 마야문명의 몰락을 보여주는 한편 힘이 없는 부족은 힘이 있는 부족이나 또는 선진 문물을 가진 종족에게 멸망하고 만다는 문명과 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중국에는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가 되었던 인물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있다. 당(唐)태종(太宗 626-649)의 후궁으로 649년 태종이 죽자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하였으나 고종(高宗 649-683)의 부름으로 후궁을 거처 황후가 되었다. 고종 사후 셋째 아들인 이현(李賢, 中宗)과 넷째 아들인 이단(李旦, 睿宗)을 폐위시키고 690년 스스로 6대 황제가 되고 당의 국호를 대주(大周, BC 1046-771의 고대의 周와 다름)로 바꾸고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무측천(武則天)이라는 호칭이 더 폭 넓게 사용되고 있다.

무측천은 제위기간 중 수 차례의 황제 폐위와 서경업의 양주(揚州) 반란, 이정의 박주(博州) 반란 등이 수도 없이 일어났으나 대군을 동원하여 곧바로 진압하고 반대파에 대한 밀고와 감시에 기초한 공포정치를 펼치며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반면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어 갔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무측천의 악행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태종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가는 정치를 했다고 하여 ‘무주(武周)의 치(治)’라고 평가한다.

705년 무후가 병으로 태상황으로 물러나자, 중종(李賢)이 복위되어 당(唐)왕조가 부활하였다. 무측천은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으나 이후 당의 전성기인 현종(玄宗, 712-756)때의 ‘개원(開元)의 치(治)’를 이룰 수 있었든 것은 무측천의 힘의 정치가 당시(唐詩)의 중흥기와 과거제도의 도입 등 모든 방면의 기초를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수(隨)나라가 양재의 폭정으로 불과 40여년 만에 몰락한 것과는 달리, 당나라는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때 후량(後梁)에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고, 중국의 통일제국으로는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를 이루어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18세에 영국의 왕위에 오른 빅토리아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은 20세가 되던 1840년 사촌인 앨버트 공(公)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독일 출신인 공(公)은 영국에서 백안시(白眼視)되고, 빅토리아도 애정을 가지지 않았으나 고결한 인격과 풍부한 교양으로써 여왕에게 훌륭한 조언자가 되어 공사와 가정생활에서 그녀를 두루 뒷받침하였다. 이기적이었던 그녀가 영국 국민이 자랑하고 존경하는 여왕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공에게 힘입은 바가 컸으나 공은 1861년 42세의 나이로 죽었다. 여왕은 독일, 러시아 등과 친척 관계를 맺었으며 64년간의 치세는 빅토리아시대로서 영국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녀는 자본주의의 선두선진국을 이루었고 2대정당제 확립의 의회정치 체재 확립과 외교면에서도 무적함대를 앞세우긴 했으나 지구상에서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이룩하였다. 그러한 빛나는 시대에 살면서도 그녀는 ‘군림(君臨)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립하여 오늘날과 같은 영국 군주의 패턴을 정립하였다.

남미대륙의 영원한 수수께끼인 마추픽추만 남기고 사라진 잉카문명과 같이 신성문자(神聖文字)만 발굴되고 있을 뿐 내부로부터 붕괴된 마야인디오 문명의 처참한 몰락, 중국을 통일하고 조선과 일본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당나라 300년 위업의 역사 그리고 해가 지지 않았던 빅토리아시대의 대영제국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앞으로도 우리의 희망과는 달리 수산업에 영향을 미칠 양자 또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등은 계속 추진될 것이다. 이것은 ‘옛날 옛적(Once upon a time)’일이 아니고 목전에 놓인 현실임을 직시하고 힘을 기르자. 국력은 목적을 달성하는 능력이고. 타국을 제어하는 협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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