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실업㈜가 올해로 창립 34주년을 맞았다. 회사 설립이후 어려운 여건과 높은 리스크 부담을 감수하면서 불굴의 의지로 신어장 개척과 신어종 개발에 앞장서고 있는 박인성 회장으로부터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재원실업을 설립하신지 36년, 1977년 대표이사로 취임하신 후 올해로 34년을 맞았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니 세월은 ‘베틀의 북’이라 했던가요? 벌써 그렇게 30여년이 흘렀습니다. 바다도 없는 논산에서 태어난 사람이 오대양을 넘나드는 야무진 꿈을 꾸었으니 지금 생각하니 만용(蠻勇)이었으나 고향에서의 수차례 구멍가게 실패와 중부시장에서의 생선장수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고난 장사꾼인 나 자신을 믿고 개양흥산을 거쳐 지금의 인성실업㈜을 1996년 출범시키고 본격적으로 원양어업이라는 꿈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모래밭에 세운 조그마한 성(城)일지라도 저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회장님은 평생 남들이 거리는 신어장 개척과, 신어종 개발 등에 앞장서는 등 끊임없는 도전을 해왔습니다. 그런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지난 12월 1일 발간한 저의 회고록 ‘시련과 도전 30년’에도 언급했듯이 저는 오대양과 극지 개발에 사운(社運)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남이 간 곳은 결코 가지 않고 미래를 개척하는 기업만이 살아남는다는 진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원양어업에 뒤늦게 뛰어든 제가 다른 기업이 개척한 곳만을 뒤쫓아 간다면 그저 안전할지는 모르겠으나 장래가 없습니다. 저는 그동안 18차에 걸친 시험 조업을 통하여 성공보다는 많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신어장과 신어종 개발에 매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메로는 아시아에서는 최초, 세계에서는 4번째 조업국이 되었고, 크릴 역시 상업적인 조업 시대를 처음으로 열었습니다.
그리고 1989년 미국의 캠벨사에서 당시로서는 거금인 1,700만불을 투자하여 재원마스터호라는 1,500톤급 참치선망선을 한국 최초로 신조하여 오늘의 우리나라 선망선 시대를 여는데 일조(一助)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태리의 100년 역사의 명문 와인기업 안티노리 가문의 혈관에는 와인이 흐른다고 합니다. 나의 인성가문의 혈관에도 대를 이어 메로와 크릴의 꿈이 면면히 흐를 것입니다.

­크릴사업 성공으로 일본산이 장악했던 국내시장을 탈환하고 역수출까지 성공하는 쾌거를 이룩했는데 그때의 감격은 어떠했습니까?
▶1999년 이전 우리나라의 크릴시장은 일본 히로마쓰가 100%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부터 저희 회사가 어획한 크릴을 국내에 공급하면서 빠른 속도로 일본산 크릴의 시장 점유율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2004년 이후에는 일본산 크릴은 거의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500만명으로 추산되는 국내 낚시 애호가들이 과거 일본산의 3분의 1의 싼 가격으로 국산 크릴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반면 저희 회사와 일본 크릴 업체의 경쟁은 2005년을 분기점으로 승부가 갈렸으며, 일본 마루하의 크릴 조업선을 저희가 전격 인수하면서 일본 내 마루하 유통망도 저희가 접수하여 저희 인성 크릴을 역수출하는 쾌거도 이루었고 이로 인하여 외화획득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 시장 공격에 그치지 않고 중국, 대만, 홍콩, 미국, 캐나다, 미국 등지로도 수출시장의 외연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참다랑어 양식과 고등어 축양 사업을 하시게 된 배경과 현재까지의 성과는 어떻습니까?
▶저는 수산업을 하면서 해양을 조화롭게 개발하여야 한다는 철학을 터득했습니다.
따라서 남해 청정바다 욕지도에 양식 터전을 마련하고 고등어, 돔, 참다랑어 등 양식을 시작하게 되었고, 영양분이 많은 우리가 어획하는 크릴새우를 생(生)사료로 사육하면 일거양득이라는 생각으로 양식을 시작하였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무한이 우수한 양식결과가 도출되고 있고, 참다랑어 등은 호주, 일본 등을 제외하고는 양식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2008년 입식한 참다랑어 치어가 현재 70~90kg까지 성장하고 있어,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하였습니다.

­회사 경영을 하면서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꼈던 때, 힘들고 어려웠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수많은 실패를 경영한 후에 개발한 메로와 크릴새우의 상업적인 조업에 성공한 것이 가장 기쁘고 보람이었으며, 힘들 때는 정부가 개발자 즉 유치산업(幼稚産業)을 일정기간 보호하고, 배려해주어 어느 정도 개발비용을 회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아무런 위험투자를 하지 않은 회사에게 너무 쉽게 허가한 때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그보다 수 십 배 힘들고 어려운 것은 (선원들이) 산업전사로 바다에서 일하다가 젊고 고귀한 생명이 희생되었을 때입니다. 재산피해는 둘째 치고, 인간으로서 괴로움을 참으로 감내하기 어렵고 국내외 유가족들을 위로할 방법이 없으며 수십 날을 불면(不眠)으로 지새우기도 하였습니다. 

­어려운 결단을 할 때에는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처음 사업을 할 때 먹었던 마음(初心)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항시 정도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마음과 소비자 입장에서 한번 쯤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무역의 날에 5천만불 수출탑을 받는 등 수산물 수출 선도 기업으로 우뚝 섰는데 수출이 늘어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수출로 먹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항시 생각합니다. 저의 회사 경영 방침 중의 하나가 수출 중심 기업으로 육성, 발전시켜 국가 산업 발전에 기여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 결과 500만불(1993년), 1,000만불(1994년), 3,000만불(2,000년)로 순조롭게 수출이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5,000만불(2011년) 수출 탑을 수상하는 데는 10년이라는 기간이 걸렸습니다.
2011년 12월 우리나라가 9번째로 1조불 클럽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저희 회사도 1억불 수출탑을 받기 위하여 수출 품목을 새롭게 개발하고 판매망을 더욱 넓혀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전진할 것입니다.

­평소의 생활신조 및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국익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국리민복(國利民福)인지 항상 생각하면서 정직하게 기업을 운영하겠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가장 가깝게는 북한동포가 식량부족의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저의 작은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릴 개발의 목표가 여기에서 시작됐습니다. 좌우명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훈도 인화단결, 회사사랑, 나라사랑으로 정했습니다.

­우리나라 원양어업이 발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산 수단인 선박의 대부분이 40년 이상 된 노후어선입니다. 이런 선박에서 어획된 수산물이 국민들의 사랑을 언제까지 받고, 식량 단백질원 공급이라는 우리의 목표 달성에 문제가 없을 수 없다는 게 솔직한 저의 고백입니다.
아무리 우리 원양 업계가 어렵더라도 선박과 품질향상을 위한 과감한 투자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저의 투자 경험으로 보아 투자 성과는 충분히 보상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포장(10kg)단위로의 어상자 혁명도 일어나야 합니다. 또한 새로운 어장을 찾고 새로운 어종도 개발하여 소비자들의 기대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원양어업이 될 것입니다.

­정부에 바라는 바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원양어업은 연근어업과는 달리 해외어장에서의 자원개발 사업입니다. 특히 원양어업 정책에는 각종 국제수산기구의 규정이 당연히 포함될 것이지만 자원보호정책에 경도된다면 1970년대에 비해 3분의 1로 감소된 원양어업 세력도 유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원보호와 자원의 지속적 개발이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국제기구에서 우리의 입장이 반영될 수 있도록 정부의 자원외교가 강화되도록 하여 주실 것을 바라고. 또한 앞에서 언급한 개발자 보호 정책에도 깊은 배려를 요청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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