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701-762?)은 이름이 백(白)이고, 자(字)는 태백(太白)이다. 그의 모친이 태몽으로 저녁 하늘에 떠있는 태백성(명성 또는 금성)이 품에 안기는 꿈을 꾼 데서 연유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백은 여러 가지 호칭을 가지고 있는데 42세 때 당(唐)나라 수도인 장안에 갔을 때 시단(詩壇)의 원로인 하지장(賀知章)이 그를 보고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귀양 온 신선이라고 불러서 적선(憐仙)이란 칭호가 붙었고, 이밖에 시선(詩仙), 주선(酒仙) 또는 청년거사(靑年居士) 등 다양하게 불리어지고 있다.

중국 문학 가운데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와 더불어 찬란한 시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의 출생이 불분명하듯이 죽음에 대하여도 분명하지 않다. 뱃놀이를 하다가 술에 취하여 양자강(채석강)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물론 기록에는 지금의 양자강 하류 안휘성 당도현에 살고 있던 먼 친척 이양빙(李陽氷)의 집에서 지금까지 쓴 시 만권의 초고를 부탁하고 62세에 병사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초당집(草堂集) 10권을 펴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서문만 남아 있다.

그리고 그의 출생지에 대하여도 학자들 간에 이론이 있는데 중앙아시아의 쇄엽(碎葉)이고, 성장한 곳이 중국(盛唐時) 사천성(四川省)의 청년향(靑蓮鄕)이라는 곳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백의 먼 조상은 한무제(漢武帝)때 북방지방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으나 제후의 자리에도 오르지 못한 가계라고 하나 이것 역시 분명하지 않다. 이백은 평생 네 명의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고, 2-3명의 아이를 낳은 것으로 그의 시를 통하여 알 수 있으나 그 후 이백의 가계는 오리무중이다.

당나라 유일의 여자황제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인재 등용을 위하여 오늘날의 공개경쟁시험, 즉 공채에 해당하는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한편 지방의 높은 관직에 있거나 중앙정부의 관리들에 의거 천거를 받아 등용되는 특별채용, 즉 특채도 있었다. 이백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당시 허울뿐인 과거 시험에 응시해 보아도 합격된다는 보장이 없고 또한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에도 맞지 않았다는 분석과 함께 처음부터 과거볼 자격이 없었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 어떤 이유든 간에 그는 두보와는 달리 과거를 보지 않았고 오로지 천거에 의한 특채로 관직에 등용되기를 수십 차례 희망했다.

그러던 중 그가 42세 때 중앙정부(궁중)에 있던 오균(吳筠)과 태자빈객의 관리로 있던 하지장의 공동 추천에 의하여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고 장안으로 들어갔고, 현종은 그의 시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종은 그에게 한림공봉(翰林公充)이라는 지금의 임시직 내지 고용직에 해당하는 직급을 주었다. 현종은 양귀비와 함께 이백이 쓴 시에 가락을 붙여 궁중가무연극단이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이때에 이백이 지은 ‘궁중행락사’라는 시 8수가 전해지고 있다.

현종은 이백의 시가 마음에 들어 궁중연회를 자주 베풀었고 이백을 찾을 때마다 이백은 예외 없이 술에 만취해 있거나 술집에서 기녀들과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현종은 그를 좋아하여 그의 직급을 정식관직인 한림학사로 승진시키려고 할 때마다 모든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인즉 근무태도 불량이 문제가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근무시간에 음주가 허용될 리 만무하니 근무평정이 항시 꼴찌이니 임금인들 방법이 없었다. 최소한 5배수(?)내에는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가능키나 한가? 번번이 진급에 실패한 이백은 음주 빈도가 더욱 높아져 그 도를 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궁중행사에 현종은 이백을 찾았으나 또 술집에서 만취상태에 있었다. 궁중으로 불리어온 이백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당시 현종을 보좌하든 고력사(高力士)라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환관에게 현종은 이백의 신발을 벗기도록 명하였다. 이런 수모를 당한 고력사는 양귀비와 힘을 합쳐 이백의 시를 모함하여 현종은 할 수 없이 그를 관직에서 해고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렇게도 출사(出士)하기를 희망하여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임시직마저 3년도 안되어 쫓겨나고 말았다.

안휘성의 추포(秋浦)로 내려간 이백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술로 나날을 보내고 시에 그의 심정을 담았다. 이 시기 현종의 휘하 대장군이었던 안녹산(703-757)의 반란 소식을 듣고 세자 이복동생인 영왕(永王) 이린(璘)의 토벌군에 들어갔다가 오히려 반란군으로 몰려 투옥되고 유배를 가는 도중 감형과 대사면을 받았다.

이백은 선경(仙境)과 환상(幻想)을 추구하는 시인이었다. 현실의 정치가 그의 기대와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어 갈 때 그는 이상적 사회를 초현실적 세계에서 구했다. 아무런 구속이 없는 신선 세계가 그의 이상향이었다. 그는 민중의 애환을 노래하고 선경을 동경하고 인생무상을 노래한 정열적인 시인이었지 공직자는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공성신퇴(功成身退)를 다짐하여 치국평천하한 후 물러나 조용히 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백시를 관통하고 있는 시정신인 굴원(초나라 정치가 겸 시인)과 장자(전국시대 사상가)가 추구하는 개인의 자유정신 세계는 출사의 기대가 좌절하였을 때 취할 수 있는 행동과 정신 자세이다. 이는 은일(隱逸)로 표현되는 현실 도피 또는 출사와 세속으로 부터의 초월이며 신선으로 이어진다고 하겠다.

장진주(將進酒)라는 시의 일부를 소개하면.. 인생이란 때를 만났을 때 즐거움을 다해야 하나/ 금 술잔이 빈 채로 달을 맞게 하지 마라(후략).

참으로 술의 시인이고 천재 시인이고 자유인이었지 공직자로서의 적성은 맞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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