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2년 후에 다가올 세계대전의 참화와 취항한지 4일 17시간 30분 앞에 다가올 최대 해상비극을 예견하지 못하고 세계 최초로 거대하고 호화로운 여객선 진수를 앞두고 전국이 축제 분위기에 한껏 들떠 있었고 표를 구한 행운의 승객들은 뉴욕 여행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된 이른바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영국의 대립, 독일과 프랑스의 대립,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민족주의 항쟁, 발칸문제들이 1914년 6월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어 삼국동맹과 삼국협상 등의 세계사적인 고차 방정식을 낳고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1912년 4월 15일 높이 30m, 너비 28m, 길이 270m, 무게 4만6000천 톤으로 당시 기술수준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는 타이타닉(Titanic)호가 승객 2201명을 싣고 북서대서양항로인 영국(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뉴욕)으로 처녀항해를 떠났으나 711명만이 살아 돌아왔을 뿐 그 많은 인명과 침몰이 불가능하다는 거함(巨艦)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마지막 항해가 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 수차례 리메이크 업 되었으나 우리는 기억의 원근법(遠近法) 탓에 최근 3D영화 아바타를 제작한 제임스 케머런 감독의 Titanic 1997(한국 개봉 ‘98.2.20)만을 선명히 기억하게 되며, 선수(船首)에서 한 쌍의 남녀(잭과 로즈)가 나는 새 모양의 십자를 긋는 가슴 뭉클한 사랑 이야기와 3등 칸의 가난한 화가 남자의 희생과 대비되는 부자의 보석 그리고 타이타닉호가 꺾이는 최후 장면에서 오늘 제목과 연상되는 하얀 턱 수염을 기른 노신사이며 기품 있는 선장이 애함(愛艦)과 함께 바다 밑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멋진(?) 선장의 책임과 고뇌를 읽었을 것이다. 과연 타이타닉호의 스미스 선장은 그에게 부여된 막중한 법적, 도덕적 책임을 다했을까? 사건 이후 전문가들의 평가는 냉혹하며 당시에 미비 됐던 관련 법령 등을 보강하게 됐다고 한다.

첫째 타이타닉호는 출항 전부터 탐조등과 견시(見視 파수꾼)용 망루가 설치되지 않았다. 둘째 유빙 충돌 후 SOS 타전대신 일등선실의 VIP들에게 무려 11분 동안 사건을 설명, 급전 시간을 지연시켰다. 셋째 신참들의 구명보트 운영 미숙으로 구명정 20척 중 18척만 운영되고 그나마 1178명 정원에도 못 미치는 711명 만 승선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넷째 북서대서양은 단거리 노선이고 4월에 유빙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22노트 최고 속력으로 항해할 것을 지시했고, 선박 설계자(토머스 애드루스)가 동승하여 조언하고 경고하여 약 470여명을 추가 구조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음에도 익사, 동사, 압사자가 속출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반면 청해부대(최영함 4500t급)는 지난 1월 21일 이역만리 인도양에서 삼호주얼리호 선장(석해균 58)은 해적에 의해 비록 다발성총상(銃傷)은 입었지만 선원 21명(미얀마인 4명 포함)을 소말리아 해적으로부터 해군 정예 UDT/SEAL에 의해 무사히 구출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이 과정에서 해군에 복무한 석 선장은 누구보다도 청해부대에 의해 구조되리라는 확신과 후배들의 작전에 도움을 주기 위한 기만, 지연전술 그러면서도 선원들의 안전에 최선을 다했다. 석 선장은 1월 29일 의료용비행기(Air Ambulance)를 타고 전 국민의 관심 속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고 13일 만에 의식을 회복한 석 선장의 첫 마디는 “좋아서...”였다.

한국 선진 의술의 도움 하에 곧 쾌차하리라고 확신되고 이로써 아덴만 여명 작전은 마침표를 찍고, 전사(戰史)의 한 페이지(쪽)에 승전보로 남을 것이고 더불어 석 선장은 책임 완수의 모범 사례로서 우리 해운사(海運史)에도 기록 될 것이다. 또한 이번 사건으로 국민의 안보의식 향상과 군 사기진작은 물론 미국과 오만, UAE를 포함 한 중동지역에 대한 외교 강화에도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냈다는데 의견을 달리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또 다른 한편 포효하는 40도란 뜻의 로어링 포티(Roaring Forty 극지인 No 8)는 남위 40도를 넘어가면 바다는 인간의 발길을 결코 허용치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곳을 개척한 원양어업의 프론티어 인성실업㈜(회장 박인성)이 있다. 수산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수산물 유통사업을 하다  원양어업에 뛰어든 중소기업 규모의 회사로 대기업도 꺼려하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어장을 열여덟 번이나 개척했고, 이 중에 하나가 극지의 남빙양 조업으로 우리 원양어업 50년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도전은 항시 희생을 요구하는 것으로 지난 1월 20일 제1인성호(선장 고 유영섭)는 남빙양 메로(정식 명칭은 Patagonian toothfish. 속칭 바다의 Black diamond)조업을 위하여 우루과이(몬테비데오)에서 선박정비 후 2010년 11월 2일 출항하여 남극조업(12.1-7)을 마치고 서쪽으로 어장 이동 중 남극 빙산군 주변 특유의 너울성 파도에 침수됨으로써 복원력을 잃고 침몰했다.

인성이 최초로 메로 조업에 도전한 것은 1993년이었지만 어구어법 개발(수심 2000m 이하 투·양승)과 그리고 자원 탐색(남위 50-76도)에 수많은 역경을 딛고 개척한 곳이기에 박 회장의 메로는 생선이기에 앞서 신앙 그 자체라고 말할 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전 사력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난해 12월 8일 예측불허의 집채 높이의 격랑과 속살을 드러내지 않은 물밑 유빙 등 복합적인 요인에 일격을 당하고 침몰함으로써 당시 승선했던 42명(옵서버 포함)중 20명이 구조되고 선장을 포함한 많은 선원들이 실종, 사망했다. 영하의 수온 하에서 인간의 생존 한계는 약 30분 전후라고 한다.

그럼에도 인성은 시련을 딛고 일어나 남극점에 가장 근접한 곳으로 인간의 숨결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던 웨델해까지 도전하겠다는 투지를 불태우고 있다. 가능성에 도전하는 자만이 얻는 법이다. 아덴만과 남빙양 두 선장의 고귀한 희생과 이들이 이름 없는 영웅(Unsung hero)이 아님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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