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가을 프랑스 해저 고고학 발굴팀이 지중해 알렉산드리아항의 파로스섬 앞바다에서 등대의 잔해를 수백 점 건지는데 성공하여 오랫동안 전설로만 전해져 왔던 파로스 등대에 대한 신비가 밝혀지고 있다고 한다. 발굴팀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4.55m, 무게 12톤의 여신상을 끌어올리는데 성공하였으나 아직도 바다 속에는 스핑크스와 오벨리스크 등의 많은 조각들이 남아 있어 그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고 밝혔다.

이 등대는 BC 280년 무렵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에 의해 파로스 섬에 세워진 것으로 등대의 효시라고 불리고 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섬과 약 1km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곳에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이 대리석으로 등대의 높이가 135m로 등대는 세 개의 층으로 만들어져 아래층이 4각형, 가운데층이 8각형 맨 위 층은 원통형으로 되어 있었고 그 위에 여신상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아마도 알렉산드리아 대왕이거나 아니면 태양신 헬라오스의 모형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7세기 이후 이집트를 정복했던 아랍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램프 뒤쪽의 반사경으로 비치는 타오르는 불길은 40여km정도 떨어진 바다에서도 볼 수 있었고 맑은 날에는 콘스탄틴노플 까지도 비쳤다고 한다. 이 파로스 등대는 상당히 오랜 기간 등대의 역할을 해오다가 1100년과 1307년 두 차례 큰 지진으로 붕괴되어 바다 속으로 사라져 잊혀진 등대가 되었으나 20세기 초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등대의 흔적을 발견한 후 프랑스 팀에 의하여 그 실체가 밝혀지고 있는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다.

기원후 이집트를 정복한 아라비아인들은 이 등대에 달린 거울로 빛을 한 방향으로 모으면 해상의 배를 태울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하거나 이 등대 맨 아래층에 숨겨진 금은보화를 찾기 위해 정복자들이 해체하였다는 등 과장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인천 팔미도 등대로 등대의 역사는 서구 열강들의 침략과 함께 시작됐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일 양국 간의 선박 왕래가 빈번해지자 외교문서로 우리나라 정부에 등대 설립을 촉구하였고 결국 열강의 강권에 못 이겨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1902년 팔미도에 최초의 등대가 세워졌다.

이처럼 근대식 등대가 도입되기 전에는 횃불, 봉화, 괭가리 등을 이용하여 항해하는 선박들을 도왔다. 일본은 영국(1759년 플리머스항의 에진스턴 등대가 현대적 등대의 효시)으로부터 등대 기술을 일찍 도입하여 1869년 간논사키 등대를 세우고 우리에게도 그 기술을 전수했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높은 등대는 높이 32m의 화암추 등대로 엘리베이터까지 있고, 최북단은 대진 등대, 최동단은 독도 등대, 최서단은 격렬비도 등대, 최남단은 마라도 등대 그리고 광달거리가 제일 큰 등대는 오륙도 등대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무인등대 266기, 유인등대 49기가 있다. 1962년 국제등대협회 정회원국이기도 하다.

특히 독도 등대는 행정기관이 독도에 상주함으로써 갖는 실효적 지배원칙을 공고히 하고  해양 영토 확장이라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동해를 항행하는 모든 선박들의 안전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그러나 세종실록(1422년)에 의하면 충남 태안군 근흥면 가의도리 앞 해상 광장목에 지방 수령이 향도선을 배치하여 세곡선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최초의 항로표지 기록이 있다.

영국 민요에 고은 시인이 노랫말을 붙인 등대지기는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위에 지고/ 한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이라고 노래했다.

영국의 소설가 겸 비평가인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는 등대로(To the lighthouse)에서 등대 빛줄기를 인정사정없이 냉혹한 것이라 하는 한편 등대의 평안함과 영원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 양면성은 등대의 본질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바위 위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떠있는 느낌의 하얀 집들은 때로는 폭풍우에 흔들리기도 하고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여름바다의 낭만이 되기도 한다. 길을 잃은 배의 좌표가 되기도 하고 약탈선, 침략의 유도등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제주도는 바다에 둘러싸인 특수한 환경으로 현대의 등대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도대’가 발전하여 왔다. 고기잡이 나간 배나 지아비가 무사히 포구로 들어 올수 있도록 돌담을 쌓고 상어간유나 송진, 석유를 이용하여 1970년대까지 불을 밝힌 토착적 등대인 해양 신호 유적으로 현재 17기 정도가 남아 있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있어서 바다는 단순한 바다가 아니라 ‘바당팟’이라 하여 또 하나의 농경지로 여겼으며 생업의 현장이기도 했다.

한편 연평도에 파시가 열리고 수천 척 어선들의 길잡이가 되어주던 연평등대는 1960년 3월 점등을 시작으로 황금어장을 비추어 왔으나 국가 안보상의 목적으로 소등하게 되면서 지금은 조용한 등대공원의 높은 곳에 우뚝 서서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미국, EU와의 자유무역협정(FTA)은 비준 절차만 남겨 놓고 있고 희망과 재앙의 경계선이 될 일본, 미국과의 협정 체결도 예정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잠든 깊은 밤 혹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겨울밤이나 무서운 파도가 요동치는 날에도 묵묵히 자신을 태워 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2011년 새해에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리 수산인의 삶에 서광이 비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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