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정부는 1889년 5월 6일 프랑스 시민혁명 100주년(1789-1794)을 기념하는 파리 만국박람회를 개막하면서 박람회의 상징인 에펠탑을 완공하였다. 높이 300m(현재는 320m), 무게  7,300톤, 18,038개의 금속 부품과 250만개의 못이 사용된 이 탑은 곧 파리의 상징물이 되었고 세계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건축물로 자타가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에펠탑 공사가 시작되자 많은 예술가들이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탑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진실로 비극적인 가로등,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운 철기둥 그리고 깡마른 철사다리로 된 피라미드 등으로 혹평했으나 탑이 완성된 것을 보고는 대부분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이 거대한 탑은 인간의 꿈이 담긴 건축물로 파리의 영혼을 상징하는 영적인 기념물이 되었고, 1930년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될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또한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는 전후 일본 최대의 이벤트였으며 77개국과 4개의 국제기관이 참여한 아시아에서 개최된 최초의 박람회였다.

총 입장객 수가 6,400만 명으로 반년 동안 개최 기간 중 하루 평균 35만 명이 입장했고, 최절정기에는 하루에 83만 명이 행사장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또한 개최 기간 중 미아가 4만 8000명, 유실물 5만 4000건, 구급차 출동 1만 1000회, 사용한 물의 양 750만 톤 그리고 쓰레기 수거만도 2만 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람회의 생산 유발액수는 약 1조 5000억 엔에 이르렀고 그중의 2/3에 해당하는 1조 엔이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킨키(近畿)지방으로 돌아갔다. 당시 미국은 1969년 달에 보낸 아폴로 8호를 비롯하여 운석과 달착륙선의 실물 등을 가져와 최고로 인기 있는 전시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 오사카 만국박람회에서 처음 보는 외국인과 상품 등은 일본인에게 실로 엄청난 쇼크를 안겨 주었다. 당시 행사장에는 약 8,500명의 외국인 스태프가 근무하였으며 외국인 관광객만 하더라도 170만 명에 달했다. 실제로 한 일본 청년은 프랑스의 레스토랑에서 아코디언 연주를 들으면서 달팽이 요리를 먹었다고 그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고 고백 했다.

1970년 경제성장의 절정기를 누리던 일본은 오사카 만박을 통해 자신들의 성공을 세계에 과시했다. 당시 일본은 경제역량 외에도 자국의 문화를 알리는데도 소홀하지 않았고 이를 계기로 채색 목판화인 우끼요에(浮世畵)는 일본 전통문화의 대표 아이콘이자 유럽 인상파 화가들에게 미친 명품의 이미지로 세계인들의 주목을 끌게 됐다. 즉 오사카 만국박람회는 고도성장의 상징임은 물론 국가가 내세우는 개발과 국민이 욕망하는 성장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성공 사례라 할 수 있다.

일본정부가 최초의 박람회를 오사카로 유치한 것은 전국시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하여 오사카성을 세우고 17세기 에도시대에 제국물산유통의 중심으로서 시가지가 확대되었고 현재 일본 제2의 도시로 상업이 발달한 도시답게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정신과 함께 첨단 도시로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각 나라의 문화와 정보를 교환하는 축제의 장인 엑스포(Exposition)의 기원은 2500년 전 페르시아제국 때 개최된 ‘부(富)의 전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BC 5세기경 고대 페르시아 아하스에로스왕이 제국의 부와 영화를 과시할 목적으로 각국 대표를 초청해 6개월간 전시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그 후 과학 기술 발달과 함께 1569년 독일 뉴렌베르크 시청에서 개최된 박람회가 산업박람회의 효시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 엑스포는 1851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Crystal Palace 박람회)라고 한다. 엑스포는 인류문명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는데 앞에서 언급한 1889년 파리 엑스포의 에펠탑을 비롯해서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를 통해 소개된 벨(Bell)의 전화, 그리고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미국의 자동차와 비행기가 실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각 국가들이 새로운 과학문명, 기술들을 전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엑스포를 개최함으로써 인류문명의 급속한 발전을 촉진시키는 순기능이 있는 반면 선진국들의 독점 개최 등 역기능도 초래되어 1928년 파리에서 정부 간 기구인 BIE(국제박람회기구)가 설립되었다.

한국이 최초로 국제박람회에 참가한 것은 1889년(고종 26년)파리 만국박람회였다. 그때 한국이 출품한 것은 갓, 모시, 돗자리, 가마 등이었다. 그러나 4년 후인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콜럼비안 박람회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국제 박람회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1962에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설립된 후의 일이다. 한국에서 공인엑스포가 개최된 사례는 1993년 대전 엑스포(주제가 새로운 도약의 길)가 처음이다. 이후 2010년 여수에서 세계박람회를 유치하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중국 상해에 밀렸고 여수는 2012년에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2012년 5월 12일~8월 12일(3개월)간 개최될 여수 엑스포(International Exposition Yeosu Korea 2012)는 ‘살아있는 바다 숨 쉬는 연안(The Living Ocean and Coast)’을 주제로 100여 개국, 5개 국제기구, 10개 기업 및 NGO의 참가가 예상되고 800만 명의 내외국인이 관람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한다.

19세기 이후 근·현대 산업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글로벌 이벤트로 자리 잡은 엑스포만큼 개최국 발전의 자극과 동인이 된 행사는 없다. 우리는 여수 엑스포를 통해서 우리 자신들의 미래를 엿볼 수 있고 해양대국, 수산입국의 꿈이 머지않아 현실로 다가오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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