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사람인 소식(蘇軾 1036-1101)이 유후(留候) 장량(張良-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공신)의 인물됨을 평한 유후론(留候論)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중국 외교부는 지난 3월 천안함 폭침사건 때 이 고전의 일부로 중국 입장을 대신한 바 있다.

天下有大勇者(천하에 최고로 용감한 자는) 卒然臨之而不驚(갑자기 어떤 일이 닥쳐도 놀라지 않고) 無故加之而不怒(까닭 없이 자신을 모독해도 노하지 않으니)의 세 구절이었으나, 다음 한 구절을 생략한 것이 북한을 의식한 자국의 진심인데 한국이 몰라줘 서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순진한 생각일는지? 此(이는) 其所挾持者(마음속의 포부가) 基大(심히 크고) 而其志(그 뜻이) 甚遠也(심히 원대하기 때문이다)라고..

한편 중국 정부는 금번 사건과 관련 부총리급 국무위원(다이빙궈)을 특사를 파견하고 양국의 양보와 절제를 요구하고 있으나 당 기관지 환츄스바오(環球時報)는 ‘북의 도발은 독주(毒酒)마시고 갈증 푼 격으로 북한에 미래가 없다’고 진일보(?)한 논평을 내놓고 있다.

일제 강점기 흑산도, 안마도, 위도를 지나 연평도에 파시(波市-바다시장)가 형성되면 몰려드는 어선과 조기를 사려고 전국 각지의 상고선(商賈船-마포, 개성, 인천, 군산 등)과 큰 손 상인들이 뒤범벅이 된 파시풍(波市風-정문기 박사)을 이룬다고 하였고, 연평도는 개도 돈다발과 조구(조기)를 물고 다녔다던 서해안 3대 파시중의 으뜸이었다.

파시 철이 되면 선박간이수리소, 임시우체국과 더불어 카바레도 생기고 신파극장이나 곡마단도 조금(小潮) 때를 맞추어 들어와 새롭고 활기찬 도시가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500가구 약 3000명이 거주했던 연평도에 250여 곳의 요정이 생기고 철새라고 불리던 500여명의 작부(酌婦)들이 선원들을 호객하였다고 한다.

공연이 끝난 다음 날 가설극장 터에 가면 돈 다발을 줍는 일도 흔히 있었다고 하니, 파시 규모를 짐작할만하다. 대부분 만취한 선주나 선원들이 구경을 나왔다가 떨어뜨리고 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남북의 폭력배들이 주먹자랑을 하는 곳으로 변하기도 했고, 이 중에는 쇠 지팡이를 짚고, 머리에는 포마드 기름을 바른 해주에서 온 두목이 제일 주먹이 샜다고 하나, 당시 억센 선원들에게 밀려 섬에서 쫓겨났다는 일화도 있다.

작은 섬에 수만 명이 일시에 몰려드니 생필품 부족은 물론 가장 심각한 것은 화장실로 어둑해지면 해변에 불빛들이 길게 늘어서 깜빡거렸는데 수백 명의 선원, 폭력배 할 것 없이 바다 쪽으로 궁둥이를 두고 실례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불빛이었다고 하니 가히 장관(?)이었으리라.

1934년 6월2일 큰 태풍이 불어 거센 파도가 일자 600여척의 어선들이 안전 대피시설이 부족한 내항으로 빽빽이 들어왔으나 강력한 비바람이 몰아치자 600여척의 어선들끼리 서로 부딪쳐 300여척이 반파 또는 전파되었고 250여명이 익사, 실종되는 우리나라 수산사에 큰 재앙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숨진 선원들을 위하여 <조난 어업자 위령비>가 세워졌다. 당시 연평도에는 매년 안강망을 위시한 2000여척의 어선들이 몰려와 연간 약 2만 톤의 조기를 잡았다고 한다.

1959년 추석 날 불었던 사라호 태풍 때도 수많은 조기잡이 어선들이 침몰되고 선원들이 사망 실종되는 제2의 재난을 맞았다. 이 직후 만들어진 것이 최숙자 씨가 부른 <눈물의 연평도>란 슬픈 노래다. 조기를 듬뿍 잡아 기폭을 올리고/ 온다던 그 배는 어이하여 아니오나/ 수평선 바라보며 그이를 부르면/ 갈매기도 우는 구나 눈물의 연평도/ 태풍이 원수더냐 한 많은 사라호/ 황천 간 그 얼굴 언제 다시 만나보리/ 해 저문 백사장에 그 모습 그리면/ 등대불도 깜빡이네 눈물의 연평도..

하지만 연평도의 비극은 계속되었다. 한국전쟁 후 연평도를 포함한 서해5도는 우리의 영토가 되고 NLL이 그어졌으나 당시 중심 어장은 NLL북쪽에 있어 조기떼를 쫓는 배들은 무의식중 월선 조업을 하다가 북한의 포격을 받고 나포 또는 침몰되는 사건들이 빈발하였고 특히 1955년 5월에는 북한군 집중 포격에 수십 명이 사망하였다.

정부는 연평도 북쪽에 어로한계선을 설정하였고, 연평도에 서해어로지도본부도 설치하여 어선들의 안전 조업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1969년 말부터 서해에 한랭전선이 밀려와 연평어장의 수온이 내려가자 동중국해에서 월동한 조기떼가 회유해 북상하지 않고 남쪽 수역에서 어장이 형성되자 홍도 근처로 안강망 및 유자망 어선들이 몰려들어 회유로마저 차단함으로써 장구한 세월 이어온 연평어장의 조기 파시는 종말을 고하고 조기탑(塔)만이 화려했던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최근 조기가 이사 간 자리에 꽃게가 찾아오고, 중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을 정부가 강력히 단속하자 어획량이 점차 증가하고 조기떼가 다시 회유해 온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던 평화로운 연평도에 지난 23일 북한 해안포대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포탄 수백발이 날아와 젊은 해병 2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2명도 사망함에 따라 전 섬 주민이 출애굽(탈출)에 나섰다.

두 차례에 걸친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사태가 불과 수개월 전인데 이데올로기의 썩은 끈을 놓지 못하고 계속 총부리를 겨누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랴, 연평도는 단순히 서해에 떠있는 섬이 아니다. 이곳 조개 무덤(貝塚)에서 발견된 토기류 등의 유적들은 신석기 시대 우리 선조들이 개를 키우고 참돔과 가오리를 섭생하면서 문명을 키웠던 역사적인 곳이다.

우리의 영토를 유린한 적을 향하여 화염(火焰)속 자주포위에 오르는 해병을 찍은 중대장의 솜씨는 퓰리처상 감이고, 철모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적을 향해 응사한 해병정신은 전 군(軍)에 귀감이 될 것이다. 먼 훗날 북한제 불발탄과 포탄 파편을 발굴해 낼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슬픈 역사를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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