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7월 작가 하근찬이 사상계에 발표한 <나룻배 이야기>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초가가 스물아홉 채, 기와집이 두 채 밖에 없는 고요한 마을 앞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고, 읍내와 이어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나룻배가 한 척 있다. 나룻배의 뱃사공 삼바우는 한국 전쟁 중 징집된 마을 청년들을 태워서 읍내로 보냈지만 전쟁터에서 지뢰를 밟아 도깨비 형상의 몰골로 불구가 되어 돌아온 마을 청년과 유골이 되어서 돌아온 청년 그리고 자기 아들을 포함하여 많은 청년들의 소식도 듣지 못하는 사이 한편으로는 전사 통지서와 함께 계속 돌아오는 유골함들을 보고는 전쟁의 참혹함으로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어쩔 도리가 없는 현실의 벽에 부닥 친다.

뱃사공 삼바우는 마을 사람들이 편리하라고 나룻배를 만들었지만 결과는 마을의 조용했던 삶이 전쟁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전사한 마을 아들의 유해를 다시 마을로 실어오는 매개체가 된 나룻배가 된 것을 원망하고, 징집하러오는 순사와 면서기를 나룻배로 건너 주지 않으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나룻배를 강 한복판으로 띄워 저항함으로써 전쟁의 부당한 폭력과 참상을 나룻배를 통하여 행동으로 고발하고 있다.

또한 농부 수삼이는 수재(水災)로 인하여 농토를 잃고 서울로 올라와서 인력거 일꾼이 되지만 입원중인 아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남의 물건을 훔치다가 옥살이를 하게 된다. 몇 년간의 힘든 옥살이를 마친 그는 자기가 감옥에 있는 사이에 믿었던 아내가 다른 사람과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실의에 빠져 딸만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나룻배 사공이 된다. 그러나 얼마 후 나룻배가 오가던 강위에 철(鐵)다리가 생기고 수삼이는 실직하게 되어 수삼이 부녀의 삶은 크게 위협 받는다. 게다가 철다리 공사 감독을 하던 일본인 기사가 자기 딸을 욕 보이려하자 격분하여 그를 죽인 후 도끼로 철교를 부수다가 달려오는 기차에 생을 마감한다.

한편 그의 딸은 수삼이가 뛰쳐나갈 때 등잔불이 넘어져 화마가 그녀 또한 삼켜버리고, 철다리 밑 강가에는 임자 없는 나룻배가 물결 따라 일렁이고 있을 뿐이다.

이 영화는 <임자 없는 나룻배>란 제목으로 1932년 일제 강점기 뱃사공(나운규) 부녀가 겪는 비극적 현실을 나라 잃은 민족의 비참함으로 그린 흑백 무성 영화로 아리랑과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다. 그리고 전한(前漢)의 역사가인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은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흉노(匈奴)에 항복한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 궁형(宮刑-去勢刑)을 당하고 하옥되었다가 출옥 후에 궁형을 당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발분(發憤)하여 130권에 이르는 거작(巨作) <사기(史記)>를 썼다고 한다.

이 사기의 항우 본기에는 진한(秦漢)이 교체되는 시기에 유방(劉邦)과 천하를 놓고 쟁패하던 항우(項羽)가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패하여 오강(烏江)에 이른 후 오강의 뱃사공이 나룻배를 강가에 대고 기다리다가 항왕(항우)에게 말하였다.

강동이 비록 적다고 하나 인구가 수십만 명이니 왕 노릇할 수 있으니 바라건대 대왕께서 급히 건너십시오. 유독 신에게만 배가 있어 유방의 군대가 닥치더라도 건널 수가 없습니다.

항왕이 웃으면서 하늘이 나를 망치는데 내가 무엇하러 건너겠는가? 나는 그대가 덕이 있는 사람임을 안다. 내가 이 말(馬)을 탄지 5년이 되었는데 마주친 자마다 상대가 없었고 일찍이 하루에 천리를 달렸다. 차마 이 말을 죽일 수가 없어 그대에게 주노라라고 말하였다.

또 말하기를 나는 유방이 내 머리에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 만호후에 봉해주겠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덕을 베풀어 주마 하고 추격하여온 유방의 군대 앞에서 스스로 목을 베어 자살했다. 항우의 몸은 다섯 동강이 났고, 목을 차지한 왕예는 두연후, 항우의 친구인 여마동은 중수후, 양희는 적천후, 양무는 오방후 그리고 여승은 영양후에 봉해졌다 한다.

이때 항우 나이 29세에 불과했다. 항우가 죽기 직전에 지었다는 28자의 시(詩)는 오늘날 중국 고전의 명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力拔山兮氣蓋世(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건만), 時不利兮妥不逝(상황이 불리하니 오추마가 달리지 않는구나), 妥不逝兮可奈何(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하리), 虞兮虞兮奈若何(우미인아 우미인아 너를 어찌하리)

오늘날 사가들은 항우가 유방을 죽일 기회(홍문관 연회)에서도 우유부단하여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아 유방을 놓쳐버렸고, 모든 면에서 우수했으나 그에게 진 것은 첫째 전술상의 실패로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둘째로 유방의 반간계에 걸려 범증과 같은 참모를 잃어 버렸으며, 셋째로 항우는 자신의 신분(장군집안)과 재능을 과신한 것이 패인이라고 지적하고, 역설적으로 항우는 유리한 상황과 지나친 자신감 때문에 민심의 향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유방은 한의 고조가 되고 400년 역사를 이어가는 대업을 이루었다. 결론으로 삼바우의 나룻배는 힘없는 뱃사공의 저항의 상징이고, 수삼이의 임자 없는 나룻배는 조국을 잃어버린 슬픈 역사의 상징이며, 오강의 나룻배는 위기를 기회로 삼지 못하고 자결한 항우의 어리석음의 상징이다.

지금 우리 앞에는 WTO. FTA라는 거센 파도가 요동치는 망망대해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지혜롭게 건너가자. 경영의 신으로 추앙 받고 있는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는 바람이 불 때야말로 연(鳶)을 날리기에 가장 좋은 날이라고 하지 않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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