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프랑스 지역의 성곽도시 아비뇽은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로마(바티칸)대신 교황청이 있던 곳으로 교황 베네딕토 12세(1334-1342)와 클리멘트 5세(1342-1352)에 의거 건설되었다. 이곳은 일찍이 론강(江)을 가르는 아비뇽 다리와 교황청 건물로 인해 12세기부터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14세기까지 교황이 머물면서 로마만큼이나 종교적 관심을 끌었던 도시이다.

아비뇽 다리는 12세기 후반 론강에 최초로 세워진 석조식 다리로 22개의 아치로 이뤄져 있다. 길이가 900m에 달하는 이 다리는 론강의 범람에 의한 홍수 피해로 다리의 일부분이 소실되기도 했는데 근래에 와서 다리의 중간부분이 또 떠내려가 현재는 다리 반쪽의 반도 안되는 4개의 아치만 남아있다.

아비뇽은 신이 사랑한 땅, 예술가들이 사랑한 프로방스(현재 남프랑스의 5개현에 걸친 지역)였지만 이곳에 머문 교황들에게는 편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비뇽 유수(Avignonese Captivity) 혹은 교황의 바빌론 포로(BC585-BC536기간 이스라엘이 바빌론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잡혔던 시기)시대라고 불리는 기간에 이곳을 거쳐간 교황들에게는 프로방스는 유배지이자 임시거처에 불과했다.

이 기간 실제로 이곳에서 생활했던 일곱 분의 교황들은 고뇌하고 번민의 기도를 하다가 떠나갔지만 아비뇽 사람들은 아직도 그 시대의 영광 속에 살고 있다. 프랑스혁명(1789-1794)을 거치는 동안 교황청 궁전은 많은 것이 파괴됐지만 아비뇽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고, 한해에 무려 50만 이상의 관광객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와 구 교황청 성곽과 아비뇽 반쪽다리를 관광한다고 한다.

1945년(소화 20년)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1915년 체코 건축가 이안 레츠르의 설계로 세워진 히로시마현(縣)의 산업장려관은 피폭당시 주변건물(76,000채의 92% 파괴)들은 전부 사라졌으나 유일하게 형체가 남아 있다.

오늘날 부서진 이 건물은 히로시마의 심벌인 겐바쿠 돔(原爆 Dome)으로 타다가 남겨진 철골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지붕, 반파되어 무참하게 무너져 내린 외벽 모습은 피폭당시의 모습으로 보존되어 원폭의 무서움을 전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1949년 8월 6일 평화 기념공원으로 지정하여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세계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고 연중 국내외 관광객과 참배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베르린 중심의 동물원역(Zoologischer Garten)에 내리면 화려한 번화가 속에 전쟁 중 파손된 채 그대로 놓여있는 한 교회가 도심의 화려함과 대비되어 인상적이다. 일명 부서진교회라고 불리는 이 교회의 정식 명칭은 독일 초대황제 카이저 빌헬롬기념교회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 폭격으로 거의 파괴되어 이 부서진 교회는 전쟁 후 베르린의 상징이 되었으며, 독일인 그들에겐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역사의 잔재이지만 전쟁의 비참함을 기억하고 전쟁에 반대한다는 상징물로 승화시키고 파손된 탑을 그대로 남겨두고 새로운 팔각형의 절제되고 단순함을 지닌 예배당과 육각형의 종탑을 건축하여 1961년 기념교회로 완공하였다 한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모차르트(W.A.Mozart)의 레퀴엠(라틴어의 안식의 뜻)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미사음악으로 폰(Von Walstegg-Stuppach)백작이 죽은 자기 아내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작곡을 의뢰했으나 미완으로 남겨진 작품을 그의 제자가 완성했고, 슈베르트가 25세 때 작곡한 미완성 교향곡(제8번)은 베토벤의 ‘운명’과 쌍벽을 이루는 명작이나 그가 작고한 뒤 40년이 지나서야 비인 필하모니 지휘자에 의하여 완성한 곡으로 이 두 편의 미완성곡은 작곡된 부분만으로도 완벽에 가까운 곡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부서진 다리나, 돔이나 종탑에 애정과 관심을 갖는가, 왜 미완성 교향곡에 음악 애호가들이 열광하는가, 아비뇽의 다리는 반쪽이지만 거기에는 전설적인 민요(民謠)와 영혼을 울리는 교황들의 고뇌의 기도가 녹아 있고, 히로시마의 겐바쿠 돔은 B-29가 투하한 원자탄(little boy)에 희생된 약 7만8천명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또한 베를린의 부서진 교회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그들 자신들의 회한(悔恨)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또한 후일 누군가에 의해 나머지 부분이 채워지기를 바랐을지도 모를 상상의 여백이 있다.

우리나라 철도의 종단점인 연천군의 신탄리역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비원(悲願)의 증기기관차가 녹슬어 있고, 한국 전쟁 중 고문과 학살의 상징이었던 ‘철원노동당사’의 포탄과 총탄 자국은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무언의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장기간 방치되어 갯벌에서 썩어가는 고선(古船)과 닻, 어느 어가(漁家)의 헛간에 방치된 고서적이나 기아에 허덕이며 수탈의 시대를 살다간 노어부들의 땀이 밴 어구들은 우리 수산사(史)에 보물임에도 어느 누구하나 관심을 가지고 보존하려는 사람이 없고, 수산박물관 하나 남겨두자는 공론이 모아진 일도 없다.

우리는 지난 날 수차례의 경제개발계획과 신(新)수산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산입국 진입에 조급한 나머지 버려서는 안되는 것까지 버리고, 바꾼 것은 없을까?  아비뇽의 부서진 다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示唆)하는가? 수산박물관 건립의 꿈은 언제쯤 실현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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