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는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의 하급무사 우타다 쇼스케(宇田多正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외가에 양자로 들어가 데라우치(寺內)라는 성(姓)을 받았다. 1901년 제1차 가쓰라 다로(桂太郞)내각의 육군대신(육군대장)으로 장수하던 중 1910년 5월 대한제국의 제3대 일본통감으로 임명되어 식민지화를 단행하는 주역으로 등장했다. 데라우치는 헌병경찰제를 강화하고 스스로 초대 경무총감이 되어 병합준비를 지휘하였다.

1910년 6월 조인된 각서에 의거하여 종래의 사법, 경찰권 이외에 일반 경찰권까지 탈취하였고, 8월 16일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을 관저로 불러 병합을 위한 담판을 개시 하였다. 같은 달 22일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처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강제적으로 병합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이 체결된 뒤에도 우리민족의 저항을 두려워하여 발표를 유보하고, 조약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금지하고 또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주권과 영토와 국민을 완전히 일본에 넘겨주는 대가로 얻은 것은 조선 황실과 친일파에게 주어진 작위와 은사금이 전부였다. 이 병합조약을 성사시키고 초대 총독에 임명된 데라우치가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안명근(안중근 의사 사촌)은 그를 선천역(宣川驛)에서 암살할 계획을 세우다가 체포되었고,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1911년 1월 민족지도자 600여명을 검거하고, 심한 고문으로 그중 105인을 기소한 일명 105인 사건을 조작하였다. 안명근은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하다가 10년 후 출옥 한 뒤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데라우치 총독은 1911년 병합의 공로로 백작으로 승작되었으며 1916년에는 원수(元帥)의 칭호도 받았다. 1대에서 9대에 이르는 조선총독(8명)들은 전원 육해군 대장이었고 3대와 5대를 중임한 사이토 총독(해군대장)을 제외하고는 전원 육군대장으로 당시 조선에서의 식민지 통치는 육군 군부의 입김이 강했다. 일제하의 민족운동은 1910년 병합부터 1945년 일본 패망까지의 기간에 한민족에 의하여 이루어진 반일독립운동이며 시민공동체운동을 의미한다. 역사학자들은 1910년부터 1919년 3.1운동 까지를 제1기로, 3.1운동 이후 1933년 신간회 해산까지를 2기로, 신간회 해산 이후 1945년 까지를 제3기로 구분하여 항일 민족운동을 설명한다.

제1기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농민 토지 수탈로 민족적 저항의 분노를 분출케 하여 의병 항쟁과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거대한 물줄기가 1919년 3.1운동으로 표출됨에 따라 1920년대 이후는 직접적인 폭압을 자제하고 은밀한 방법으로 민족운동 분열책을 시도하였으나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등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1926년의 6.10만세운동, 1929년 11월 3일의 광주학생운동 등이 2기에 일어났다.

또한 신간회를 해산하고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대륙침략의 의도를 분명히 함에 따라 한반도를 후방 병참기지화 하였고, 1920년대의 유화적인 통치를 포기하고 전쟁을 위하여 각종 자원과 인력동원에 혈안이 되었다. 특히 이 기간에 황국신민정책 강화, 민족말살, 언어박탈, 자원수탈 등 식민지배의 동화정책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바로 이 시기 즉 3기에 제주 잠녀들에 대해서도 전복, 소라, 해삼, 진주 등에 대해 세물(稅物)이라는 이름으로 수탈이 시작됐다. 또한 일본 잠수기 137척이 몰려와 조업 금지기간에도 장비를 동원한 어로 활동을 하는 등으로 자원을 고갈시켜 제주 잠녀들의 생계를 크게 위협하였다.

제주 잠녀들은 일제의 수탈사건의 진상, 일제의 침략성과 불법적인 탄압을 규탄하는 격문을 전도에 살포하여 반일역량을 결집하고 리, 면, 도에 해녀투쟁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창설하고 투쟁체제를 정비하였다. 특히 1932년 약 3개월에 걸쳐 연인원 17,000명의 해녀들이 빗창(전복채취 쇠갈고리)을 들고 일어서서 싸웠다. 이것은 잠녀라 불리는 해녀들이 궐기한 여성 어민항쟁으로서 생존권 확보 및 일제의 수탈에 항거한 여성의 권리쟁취 투쟁으로 전국 최초 그리고 최대 규모였다. 이 투쟁은 일시적인 생존권 투쟁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실시했던 야학교사인 강관수(해녀의 노래 작사)밑에서 교육을 받은 잠녀들이 중심이 되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지속적으로 주도해 나갔다고 한다. 당시 주도자들은 일경에 채포되어 물고문과 무릎누르기 등 여성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잠녀들의 항쟁의 결과 공동판매제도와 특정상인 지정폐지 그리고 육지출가 문제 등 일부문제만 해결되어 성과는 미흡했으나 제주 잠녀 항쟁은 반일, 반제의 항일 운동이었고 제주 해녀들의 저력을 보여준 투쟁으로 국권이 피탈(被奪)된 경술국치(한일병합) 100년에 즈음하여 면면이 이어온 해녀들의 꺾이지 않는 개척정신과 근면성은 오늘도 망사리(그물), 태왁(뒤웅박)과 함께 숨비소리(해녀들이 물 밖으로 올라와 가쁘게 쉬는 숨소리)는 이어지고 있다. 지난 10일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식민지배 통절반성 담화에 얼마만큼의 진정성이 담겨 있는가? 새로운 100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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