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동부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애팔라치아 산맥에서 발원하는 포토맥 강(Potomac River)을 사이에 두고 수도 워싱톤 D.C.와 마주보고 있는 곳에 알링톤국립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ery, 1864년)가 있다.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과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 약 16만 명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의 댈러스에서 암살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과 함께 영면에 들었고, 5명의 목숨을 화마(火魔)로부터 구해내고 자신은 불속에서 나오지 못한 노숙자(Ray Vivier, 61세)도 이곳에 묻혀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사람이 있다. 지금 그녀가 살아 있으면 6.25 60주년에 90살이 되는 마게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도 이곳에 있다. 그녀의 비석에는 이름과 출생 그리고 45세에 요절한 날자 외에는 비문 한 줄도 없다. 그녀는 불꽃같이 살다간 종군 여기자로 6.25 한국전쟁에 종군한 300여명의 종군기자 중 유일한 여자 종군기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30세의 젊은 나이로 1950년 6월 21일 뉴욕 헤럴드 트리뷴(The New York Herald Tribune)지의 도쿄특파원 및 지점장으로 부임했다. UC버클리대 졸업, 컬럼비아대학원(저널리즘)석사 학위를 소지한 지성이기도 했다.

불어에 능통(모친이 프랑스인)하여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군을 따라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종군하였고, 1945년 스타즈 앤 스트라입스지의 기자 한 명과 독일 남부의 타카우 유대인 수용소에 지프(Jeep)를 몰고 미군보다 먼저 도착하자 수용소장(독일군 준장)은 그 두 기자를 미군 선발대로 오인하여 백기를 들고 항복하였다는 일화는 미국 언론계에서 전설이 되었다.

1948년 소련의 베를린 봉쇄에 따른 생필품 공수작전 취재, 1949년 마오쩌둥 공산정권 수립 특종과 아울러 도쿄특파원 부임 나흘 만에 6.25가 발발하자 6월27일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한강 인도교 폭파를 목격하였고 이 기사를 송고하기 위하여 당일 군 수송기를 타고 도쿄로 가서 전 세계에 타전 하였다. 그녀는 6월29일 다시 한국으로 날아와 당일 맥아더 장군의 전선 시찰을 밀착취재하고, 수원 비행장 활주로에 앉아 타자기를 두드리다가 맥아더 장군의 눈에 띄어 전용기에 동승하게 되고 기내에서 단독 인터뷰하는 행운까지도 겹쳐 타 언론사가 추종할 수 없는 특종에 특종을 거듭하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부상병에 대한 수혈 봉사와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시 상륙정을 타고 적의 후방에 상륙했다. 이때의 체험기사(War in Korea)로 1951년 국제보도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1953년 휴전이 되자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65년 라오스에서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 중 급성 풍토병에 걸려 귀국해 치료하던 중 수많은 전장에서도 살아남은 그녀는 45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1965년에 발간된 ‘대사건 대기자’에 그녀를 대기자 반열에 올려놓았다. 1937년 마오리-영국인 혼혈로 태어난 대기자 피터 아넷(Peter Arnett)은 27세에 AP특파원이 되어 베트남 정글, 엘살바도르 산악지대, 아프가니스탄 황야, 그리고 이라크 바그다드 등 40여 년 동안 18개 전쟁을 취재하였다. 베트남 특파원 시절인 1966년 인접국 라오스의 쿠테타를 취재하기 위하여 여권, 20불 미화 한 장과 기사를 이빨로 물고 라오스에서 태국 국경까지 메콩강을 헤엄쳐 건넌 아넷은 이 기사로 1966년 퓰리처상을 안았고, 1991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서방 기자 중 마지막까지 남아 57일간에 걸친 미군 공습 장면을 CNN화면으로 전 세계에 생생히 생중계하였다.

시모어 M. 허시(Seymour M. Hersh) 대기자(UPI. AP. 뉴욕타임스)는 1968년 월남 ‘밀라이 양민 학살 사건’ 전모와 그 후유증을 고발하여 1970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찰스 헨리(Charles J. Henley)AP통신 기자는 한국 전쟁 중 일어난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을 1999년 9월 29일 파헤쳐 탐사보도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등 통산 100여 개국에서 순회 특파원으로 활동한 대기자였다.

또한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은 종군 기자는 아니었으나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에 있을 때 ‘오늘과 내일’이라는 국제외교평론에서 ‘냉전(Cold War)’이라는 국제 정치의 유행어를 만들었고, 1962년 의사혁명과 여론(Public Opinion)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대기자였다. 제임스 레스턴(James B. Reston) 역시 종군 기자는 아니었으나 뉴욕타임스지(부사장)의 상징적 존재인 저명한 정치기자였으며 퓰리처상을 두 번(1945, 1957년)이나 받은 거목(巨木)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대기자 제도는 1994년 4월 중앙일보가 처음 도입하였다. 이후 김영희(국제), 김중배(정치), 오풍연(법조) 등 많은 대기자들이 일간지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약 700여종에 달하는 전문지에서는 대기자 탄생 소식이 없다. 한국 언론 역사 100년 그리고 수산전문지 역사 40년 불혹의 나이를 맞고 있다. 연안국의 200해리 해양 분할, 한·일·중 어업협정체결, FTA체결, 매립·간척으로 사라진 갯벌, 수산물 중금속 오염과 항생제 오남용, 거대기업의 해상유류오염에 대한 어업인 생계대책, 그리고 편견으로 얼룩진 바다의 날 행사에 이르기까지 수산정책 당국에 대한 고발과 대안 제시 그리고 북태평양에서 남빙양에 이르는 탐사보도 등 그 노력들이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된다.

전문기자에 대한 변변한 상하나 없는 열악한 풍토에서 묵묵히 외길을 걸어온 분들이 많다. 이제 우리도 현대 수산사에 족적을 남긴 그분들에 대한 공론을 모을 때다. 수산 대기자 탄생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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