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소설가 윤홍길의 완장(腕章 1983)이 MBC에서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어 이 작품의 임종술씨 역을 맡은 텔런트 조형기씨가 우수 연기자상을 수상하였다. 벌써 20 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나 조형기씨의 완장을 찬 연기가 얼마나 완벽했던지 지금까지도 진하게 남아 있다.

개발 붐으로 벼락부자가 되어 기업가로 변신한 최사장이 저수지 사용권을 얻어 만든 양어장을 관리하기 위하여 동네의 불량배인 임종술을 고용한다. 그는 적은 임금으로 고용되지만 관리인 완장을 차고 양어장 관리 업무에 그 세도가 어찌나 대단한지 저수지에 낚시를 온 꾼들이 혼쭐이 난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완장을 계속 차고 다니며 으스대면서 저수지에 대한 강한 집착을 넘어 안하무인이 되고 배수문제등으로 이장과 농민들에게 까지 행패를 부린다. 그를 사랑한 술집 작부 부월이의 설득으로 완장을 내려놓고 새 삶을 찾아 떠나면서 부월이가 한 말이 이 시리즈의 백미다.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진짜베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아 자기는 지서장이나 면장 군수가 완장 차는 꼴 봤어? 완장 차고 댕기는 사장님이나 교수님 봤어? 권력 중에서도 아무 실속 없이 넘들이 흘린 뿌시레기나 줏어 먹는 핫질중에 핫질이 바로 완장 인게여” 부월이의 이 말에 임종술은 무너져 버렸다.

한국 전쟁 이후 정치권력의 폭력성과 보통 사람들의 암울한 삶을 해학적인 필치로 그려 낸 것이 완장이다. 완장은 원래 중세의 기사들이 갑옷위에 차던 팔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완장문화하면 권위의식이나 특권의식이 만연해 있던 사회의 문화를 비유하는 말로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는다.

또한 완장이 주는 의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권력의 힘을 빌려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인간들에게 끝없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하여 결국은 허망한 완장으로 끝나게 된다는 권선징악의 결론을 우리는 기대하게 된다. 6.25 한국 전쟁 중 머슴, 소작인등 이전의 약자들이 찬 붉은 완장은 바로 어제까지의 주인이나 지주를 인민재판장에 끌어내거나 즉결 처분하는 등 공포의 상징과도 같았다.

1939년 9월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폴란드의 유대인들에게 별표가 그려진 완장을 채우고는 그들을 모조리 집단 수용소인 아우슈비츠(Auschwitz)에 집결시켜 약 100만-250만 명을 처참히 죽였다. 그들은 또한 덴마크에서도 유대인만을 색출하여 별이 그려진 노란 완장을 팔에 차게 했다. 그러나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유대인 완장을 차고 있었다. 독일군은 덴마크 국왕 크리스천 10세를 찾아 갔다가 놀라고 말았다. 국왕 자신도 완장을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 상징 십자장(Swastika)은 원래 1870년 오스트리아 범게르만주의의 정치가인 쉬너러의 추종자들에 의해 사용됐으며 나치는 1920년 스와스티카를 공식적인 상징으로 채택, 당기와 배지 및 완장 등에 사용했다. 끝이 구부러진 십자가인 스와스티카는 기하학적으로 불규칙한 20각형이며 산스크리트어에서 행운을 뜻하는 스바스티카(Svastika)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특히 힌두교 경전에서 최고의 신 브라만 또는 부활 등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Gestapo)의 완장은 생사를 넘나드는 공포의 상징이기도 했다.

지금 50대 이상은 완장 문화를 겪은 세대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주번(週番)에겐 완장이 주어졌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규율(規律)이라는 완장을 찬 선배들이 지각, 두발, 복장 등을 점검했고 그들의 위세는 대단
했다. 그리고 학도호국단 군사훈련을 받을 때의 대대장은 가로로 세 줄이 난 완장을 차고 전교생을 압도했다. 또한 잘 살아 보세를 외치든 시절의 새마을 완장과 외출. 외박증을 검사하는 헌병(MP. SP)을 피하기 위해 한번쯤은 멀리 돌아간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월드컵 경기 중 우리 대표팀 주장 박지성 선수는 팔에 노란 완장을 차고 열심히 뛰었다. 인맥이나 연공서열 대신 실력으로 뽑힌 완장, 권력 남용 대신 완장을 무거운 책임으로 받아들였기에 그 토록 많은 국민이 그를 사랑했다. 사상 첫 해외원정 16강 진출을 이룬 뒤 청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는 그의 팔에 찾던, 그동안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을 노란 완장을 벗어 대통령께 드렸다. 얼마나 홀가분했을까?

반면 넬슨 만델라 경기장에서 브라질 네델란드 간 경기에서 자책골과 함께 브라질의 패색이 짙어지자 노란 완장을 찬 브라질 주장 펠리페 멜루는 네델란드 선수에게 심한 테클을 했을 뿐 만 아니라 고의로 그의 다리를 짓밟는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 되었다. 그 결과 레드카드를 받고 불명예스럽게 퇴장을 당했고 10명이 싸운 브라질은 삼바축구의 명예도 지키지 못한 체 8강에서 탈락했다. 월드컵 사상 역대 최다 골 기록 보유자인 브라질의 호나우드는 그를 수치스러운 선수로 지적하고 조국 브라질로 돌아오지 말라고 질타했다.

페어플레이 주장의 모범을 보인 박지성의 노란 완장이 더욱 빛나는 것은 꼭 이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지난 12일 새벽 60억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었던 남아공 월드컵은 80년 역사에 처음으로 스페인이 우승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승패는 인간과 신의 합작품이라고 한다. 이젠 수산의 푸른 미래를 위해 우리 모두 녹색 완장을 차자. 역경 속에 피는 꽃이 훨씬 아름다운 법이다.

저작권자 © 수산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