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이 문학단체의 수년간 수필분과위원장이라면 당연히 수필의 아버지라 불리는 금아 피천득 선생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3대 명 수필은 인연(피천득), 산정무한(정비석),낙엽을 태우면서(이효석)를 말할 수 있다. 국민적 사랑을 받는 많은 문인이 장수(100세)한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황금찬 시인이 몇 년 전 100세를 넘기셨고 피천득 선생도 100세를 3년 남겨두고 타계하셨다. 선생은 자신이 태어난 5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한 21살 청신한 얼굴이다. 내나이를 세어서 무엇하리, 나는 5월 속에 있다. 자신이 썼던 글과 같은 삶을 살았던 ‘5월의 소년’ 이 5월의 끝자락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평생 소년으로 살았으며 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라고 하였다.

선생의 대표작 「인연」 수필 마지막 부분에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이 짧은 문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젊은 시절 선생과 일본인 소녀 아사코(朝子)의 만남과 이별의 추억을 잔잔하게 묘사한 이 수필은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알려진 명 수필이었다. 선생의 수필은 근대 수필의 기초를 세우고 독자적인 미감을 만들어낸 수필 문학의 선구자였고 자신의 「수필」에서도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조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라고 정의하고 실제로 그의 글은 맑고 담백하면서 향기로웠다고 얘기하고 있다.

또한 그는 한국의 서정적 수필의 대표자이며 생활 속에 섬세하면서 다감한 문장으로 그려내면서 「수필의 전형」으로 지목하고 있다. 1920년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평탄치 못한 인생을 살면서 7살 때 아버지를, 10살 때 어머니를 여윈 뒤에 일제 치하에 전쟁 같은 삶을 살아온 세월이었다. 경성고보 시절 학생의 글을 눈여겨 본 춘원 이광수의 권유로 중국 유학길에 올라 1931년 호강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신동아」에 「서정소곡」을 발표해 등단하면서 시와 수필분야에 눈부신 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글은 평이한 듯 보이지만 읽고 나면 독자들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여운을 남기고 있다, 실제로 잘된 글이어야 보는 사람이 즐겁고 글쓴이도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라고 자신을 말하기도 했다.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데뷔해서 영문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정년 1년 전에 퇴직하고 1970년 중반에 절필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내 글이 전보다 못한 글을 쓰고 있어 그래서 절필했노라고 했다. 그렇게 세상 사람에게 많은 일화를 남기고 담백한 글과 함께 단아한 삶에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

지금도 이해인 수녀의 추모사가 생각난다. “생전에도 뵙고 나서도 돌아서면 금방 다시 그리워지던 금아선생님. 존재 자체로 시가 되고 수필이 된 선생님 바다에 산호가 되고 진주가 되신 우리 선생님„ 안녕히” 그의 대표작으로 “인연„ ”유순이„ ‘구원의 여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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