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물도(대매물도, 소매물도, 등대섬)는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타면 1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다. 조선 시대에 매매도(每每島), 매미도(每味島), 매물도(每勿島, 每物島)로 표기되었다. 또는 섬의 모양이 군마의 형상을 하고 있어 마미도(馬尾島)라고도 했다. 매(每), 물(勿) 등은 물을 의미하던 옛말로 육지로부터 먼 곳에 위치한 섬이었음을 알려준다. 매물도란 지명은 대항, 담금 부락에서 매물(메밀)을 많이 생산하여 얻어진 지명이라고 한다(통영군지). 특히 등대섬의 ‘글씽이 굴’은 중국 진시황 때 불로초를 구하러 온 서불(徐市, 徐福)이 해금강 등 20여 곳에서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자 ‘서불과차(徐市過此)’라고 적어놓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필자가 통영수산연구소에 근무할 때 조사선을 타고 수차례 들렀었다. 매물도는 통영 8경 중 하나로 섬의 풍광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주변 수역에 수산자원도 풍부하다. 지금도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제일 많이 찾는 섬이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산 흔적이 있으나 왜구들의 등쌀로 공도(空島)가 되었다가 1810년경 고성, 사천 등지로 부터 입도하였다. 반면 1825년부터 2년에 걸친 흉년과 괴질로 전 도민(島民)이 사망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사건으로 ‘꼬돌아졌다’(꼬꾸라지다)‘라고 하여 ‘꼬돌개’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지금은 1869년과 1904년에 건너 온 이주민들의 후예(약 50세대, 140명)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다. 섬 주변수역에는 삼치, 가자미, 볼락, 참돔 등 유용자원이 풍부하여 어업과 농업을 겸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고구마, 콩, 마늘 등이며 약간의 쌀과 보리도 생산한다. 염소도 방목하나 바위타기의 명수들로 잡기가 어렵다고 한다. 또한 전복, 해삼, 멍게, 소라, 낙지 등과 김, 미역 등의 해조류 자원도 풍부하다. 이 중에서도 매물도 미역은 옛날부터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 있다. 매물도의 미역밭은 16개로 분할하여 마을공동어장으로 가꾸고 있다. 이 미역밭은 14가구가 채취권을 가지며, 매년 제비를 뽑아 구역을 결정하나 풍흉으로 희비가 엇갈린다. 작황이 좋지 못한 구역을 뽑은 가구에게는 남은 2개 구역을 추가로 할당하여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주는 지혜도 발휘하고 있다. 마을공동어장제도 이전에도 제주 해녀들은 건저 올린 해산물의 반을 마을에 넘겨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곳에는 50여년의 물질(제주방언) 경험이 있는 열 댓 명의 현역 해녀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군해녀들은 지팡이 신세를 지고 있다. 미역을 가득 담은 ‘테왁(두렁박)’을 지고 오르던 가파른 골목길은 울긋불긋 배낭맨들로 가득하다. 초기 자생적이거나 제주도 등에서 건너 온 분들은 척박하고 한정된 농지 탓으로 물질로 얻어진 수확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자녀들의 생육과 교육비도 충당했다. 잠수병, 이명, 저체온의 두통 등에 시달리면서도 물질을 중단하지 않았다. 옛날에는 거의 맨몸으로 살을 에는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 춘궁기에 해풍에 썰어 말린 고구마 빼떼기 죽으로 허기를 달래며 강인한 정신력 하나로 버텼다. 지금도 매물도에서는 바다를 ‘바당’이라고 하는데 이는 제주도 방언으로 해주 해녀들이 정착한 증거다. 또한 아이를 낳거나 귀한 손님이 오면 성게미역국을 대접하는데 이 역시 제주음식이다. 한편 통영(서호시장)에 가면 시락국(시래깃국)과 옛 추억의 빼떼기죽을 별미로 팔고 있다. 따라서 매물도는 제주도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섬이다. 물론 해녀(잠녀, 좀녀, 좀네)의 원조는 제주도이나 해녀란 말은 정작 거의 쓰지 않는다. 잠녀들이 오랜 시간 잠수 후 내뱉는 ‘숨비소리’는 ‘생과 사의 경계’ 또는 ‘생애 최후의 날숨’이라고 자조한다. 정조(正祖, 조선 22대) 와 제주목사가 잠녀들이 겨울에 거의 알몸으로 찬물에 뛰어들어 전복을 캔다는 얘기를 듣고 전복 먹기를 중지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럼에도 정조 이 후 잠녀들의 섬 이탈을 묶어놓고, 조정에 바치는 공물(稅弊)의 요구가 더욱 거세지자 ‘신축민란(辛丑民亂)’이 일어나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 1105년(고려 肅宗) 탐라군이 개편되면서 구당사(勾當使)로 부임한 윤응균(尹應均)은 잠녀들의 나체조업 금지령을 내렸다. 조선시대에는 남자 잠수부도 있었다. 그들은 포작인(鮑作人), 포작간(鮑作干), 복작간(鰒作干)등으로 불렀고, 후에 머구리(Helmet diver)의 시초가 되었다. 이 포작인이 후에 보자기(보재기)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1701년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잠녀복(물옷)을 고안했다는 기록도 있다. 요즘의 보온성과 내압성이 뛰어난 현대식 잠수복(오리발 포함)은 1970년대 일본을 경유하여 유럽에서 들어왔다. 1999년 시인 이생진은 ‘산하나 넘어서/ 물이 길을 내주면/ 맨발 벗고 가는 길/ (중략)/ 살아서 등대를 좋아한 탓이라며/ (후략)라고 소매물도 등대를 읊고 있다. 섬 중앙 장군봉 인근에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말기 구축한 쇠락한 포진지도 있으나 오누이의 사랑 전설이 담긴 남매바위와 해품길(둘레길)이 오늘도 모두를 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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