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중 ‘이년아, 가슴을 칼로 저미는 한이 사무처야 서편 소리가 나오는 뱁이여’는 서편제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의 한 구절이다. 서편제(이청준 원작 남도사람)는 1993년 임권택 님을 최고의 감독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었으며 무명 신인 배우 오정해(송화 역)를 충무로의 샛별로 뜨게 했다. 이 영화는 국내(6개 부문)는 물론 국제(상해-2개 부문) 영화제에서 수상 경력이 화려했다. 당시 국산 영화의 국내 상영관 점유율은 10∼20% 수준으로 열악했다. 서울 관객 103만 명(주라기 공원 106만 명)은 엄청난 흥행 성적이었다. 서편제에서 아들은 북을 치며 아버지(유봉)와 딸(송화)이 진도아리랑을 주거니 받거니 부른 꼬불꼬불 들녘 돌담길은 청산도의 아름다운 섬 길이 되었다. 청산도는 해적과 왜침이 잦았던 곳이었다. 1886년(고종 3년)에 이순신 장군이 전략요충지로 설치했던 진(鎭)이 폐지되고, 1896년 완도군의 청산면이 되었다. 청산도는 임진왜란 이후 주민들이 입도하였고, 물도 푸르고 산도 푸르다 하여 청산도라 했다고 한다. 또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선산(仙山) 또는 선원(仙源)이라고도 불렸다. 청산도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고등어 파시(波市)가 열렸든 어업전진기지였다. 그러나 고등어 자원이 감소되면서 젊은이들이 섬을 등지고 어업인구도 줄어들어 지금은 3000여명이 거주하는 반농반어의 촌락이 되었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도시 사람들은 잃어버린 고향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숨을 가다듬는다.

청산도의 도청리는 오래전 고등어 파시로 성황을 이루던 곳이다. 연평도에 조기 파시가 있었다면 청산도는 부산이나 일본의 선단이 몰려드는 고등어 파시(6∼8월)로 수 백 척의 어선과 수 천 명의 선원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곳이다. 1934년도 고등어 풍어로 한 마리의 가격이 34전(현재 약80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청산도 개들도 입에 돈을 물고 다닐 정도로 흥청거렸고 밤새도록 유곽에선 흥겨운 가락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고등어 잡이 선단(건착망)은 매일 만선으로 운반선에 옮기지 못한 물량은 바다에 버렸다. 도청리 앞바다는 고등어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미처 처리하지 못한 고등어는 망옷(퇴비)을 만들어 쓸 정도로 지천이었다. 청산도 주민들은 고등어를 얻어다가 소금 간을 해서 켜켜이 간독에 쟁여 놓고 먹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고등어 자원이 줄어들면서 파시가 막을 내렸다. 당시 청산도 고등어 파시는 교과서에 실릴 만큼 유명했고, 지금의 파시거리엔 1930년대 파시 이야기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하지만 뒤이어 물려든 삼치 떼(7∼8월)가 고등어 파시의 뒤를 이었다. 당시 고급 어종으로 대접 받던 삼치는 전량 일본으로 수출됐다. 1970년대 초반까지 청산도 인구가 13,500명이었다니 당시의 파시 규모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삼치 파시도 막을 내렸다. 파시의 종말로 어선도 사람도 주막과 종사자들도 섬을 떠나고 한적한 섬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철따라 멸치, 갈치 어장이 형성되나 그 시절과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마을공동어장에는 소라, 전복, 돌미역 등 해산물이 풍부하다. 제주에서 건너와 정착한 해녀들이 채취한 청산도 전복의 맛은 일품으로 수도권에서도 알아준다. 1960∼70년대에는 제주 해녀 배 14척에 300명의 해녀들이 상주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조간대는 마을어장, 조하대는 나잠 해녀들이 조업했다. 현재 낚싯배들만이 몫 좋은 길목에서 도미, 광어, 우럭, 농어 등 낚시광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도 척박한 황토밭과 어장을 끈질기게 지켜온 남도인들의 투지는 좌절시키지 못하고 용기를 솟구치게 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 김장철에 바다 바람을 맞고 자라 튼실하다고 소문난 청산도 육 쪽 마늘을 주문했다.

청산도는 2011년 슬로시티로 국제슬로시티연맹에 1호로 등록되었다. 푸른 바다와 산,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된 구들장 논, 처마까지 치솟은 돌담길 등은 느린 섬 청산도를 상징한다. 청산도 슬로길(11개 코스)은 제주올레, 지리산둘레길 등과 함께 대표적인 길이다. 섬이 지향하는 슬로건 역시 ‘삶의 쉼표가 되는 섬’이다. 느림의 미학을 나타내는 조형물들이 곳곳에 서 있다. 서편제 주인공들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는 장면은 느리게 흘러가는 청산도의 시간을 말해준다. 예전에 북적이던 청산항 일대는 고등어와 삼치 파시가 열리던 파시문화거리로 조성돼 있다. ‘일제강점기 청산도 고등어 어업...’과 ‘청산도 해녀 유입...’이라는 논문까지 등장하고 있는 청산도 어업사는 우리 수산사의 한 쪽이다. 이 외에도 ‘통’이라고 하는 전통적 해조류 채취공동체는 해안가(43km)를 공유하면서 해조류를 공동으로 채취하고 그 수익을 평등하게 분배하는 전통적인 어업공동체다. 청산도의 양대 파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나 주민들은 마을어장을 가꾸고, 끄슬쿠(흙덩이 분쇄 농기구) 소리와 함께 보리밭과 마늘밭을 꿋꿋이 경작하고 있다. 지금 청산도는 어업과 농업유산이 공존하는 생명의 섬으로 조명되고 있다. 청산에 살으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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