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전인 2003년도에 재경 동기생 명단을 보니 모두 60명이었다. 지난달 5월에 18명의 동기생들이 7년 만에 전체 모임을 가졌다. 그동안 변한 모습에 어떻게 살아온 건지 궁금한 얘기들을 차례대로 풀어 놓고 있었다.

1964년도 항해사 조남직은 제2지남호(제동산업)가 남태평양 사모아 부근에서 삼각파도에 휩쓸려 침몰되었다는 소식에 조난사고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같이 부산에 입학한 친구 송세배가 살아남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였으나 현장에서는 23명 선원 중 2명만 살아남은 끔직한 사실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동기생 문인리는 살아남았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설적인 거제 출신 동기생 문인리를 순대국밥집으로 불러서 당시의 가슴 아픈 얘기들을 8순에 이르러 힘들게 회고하게 하였다.

문인리는 졸업 후 1963년 12월에 사모아에서 제2지남호가 침몰했고 23명의 선원들은 뗏목위에서 표류하던 중 수영에 자신 있는 4명이 구명환(우끼)을 끼고 상어가 득실대는 바다를 10시간 헤엄쳐 2명만 조그만 섬에서 살아남은 기적의 동기생이었다. 그 무렵에도 1965년 1월 사모아 수역에서 조업하던 「아투에호」(동기생 주문진 출신 박용태 선장)도 역시 기상 악화로 침몰하여 22명중 19명이 순직하였다. 원양어업 초창기에 개척에 나선 동기생들은 높은 파도를 헤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었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북극성을 보면서 항해하던 그 시절은 위험을 감수한 피와 땀의 사투였고 모험이었으며 동기생들은 항해사로, 선장으로 여러 명이 고귀한 생명을 잃은 순직의 역사였다.

그리고 1960년대 침몰한 원양어선에서 유명을 달리한 44명(제2지남호와 아투에호)의 영혼들이 50년 만에 2015년 귀국하여 위령탑에 안치되었다. 순직 선원의 귀국을 위하여 기록을 찾고 관련 기관으로 동분서주한 문인리의 공로(부산일보 발표)가 컸다 하겠다. 그는 순직한 동료들을 그대로 보낼 수 없는 것은 혼자 살아남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에서 나온 발로였다고 말했다. 순직한 선원의 위령탑은 1975년 9월에 부산 태종대 입구에 건립되었으며 1979년부터 매년 9월이 되면 위령제를 지내면서 영혼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2009년까지 8,879위 영령의 위패가 안치되었고 현재 9,205명의 영혼이 이곳에 잠들고 있다.

우리나라 원양어업은 참치 연승시험선 지남호가 1957년 6월 부산항을 떠나 인도양으로 출항하면서 시작되었고 60∼70년대 우리나라 경제 개발에 초석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한 산업역군으로 원양어업 개척에 큰 획을 긋는 고귀한 그들의 노고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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