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순 감옥에서 3년 간 수감되고 사형당한 안중근 의사의 순국의 현장을 보면서 며칠간을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잠을 설치듯이 너무나 강한 상념이 밀려왔다. 가슴 아픈 역사 속에 비통한 심정으로 안 의사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애국지사의 넋을 위로하고자 한다.

중국 대련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여순 감옥은 러시아와 일본이 8,000여평 규모로 건립하고 3,000명의 수인들을 수감하고 처형한 악명 높은 감옥이었다. 안중근 의사(1879~1910)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32세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했다.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호 히로부미(이등박문)을 사살하고 1910년 3월 여순 감옥에서 사형 당했다. 지난 4월 여순 감옥 현장에서 중국인의 안내로 감옥 내부와 전시물을 샅샅이 보면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감옥 안에 따로 안 의사의 기념실이 마련되어 있어 그의 유물과 휘호, 기록사진, 흉상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애국지사의 유훈을 후손들에 알리는 사명감으로 기억하고 글을 남겨야만 한다. 15억의 중국인조차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항거치 못한 부끄러움에 안 의사의 숭배 인물로 칭송하는 휘호들이 벽면을 장식했다. 안 의사는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1909년 1월에 러시아 키리에서 동지 11명과 함께 왼손 무명지를 절단하고 그 혈서를 태극기에 쓰고 천지에 맹세한 「단지혈맹」이었다.

그는 순국 한 달을 앞두고 감옥에 앉아 칼칼한 먹으로 글씨를 썼다. 현재까지 유묵 휘호는 모두 60점으로 30점은 한국에 나머지는 일본에 있으며 유묵은 단지 혈맹의 손도장이 찍혀 있었다. 안 의사 글씨는 잘 썼기에 옥중에서 일본 담당 검사와 형무소장이 안 의사 휘호를 얻어 갔다. 1910년 3월 26일 안 의사가 사형 당한 순국의 날이었다. 아침에 두 아우와 프랑스인 신부가 면회를 했다. 이때 안 의사의 어머니가 차입해 준 흰 명주 저고리와 검은 바지를 입었고 두 아우에게 유언을 했다. 나의 시신은 감옥 묘지에 매장 인도될 것이며 국권이 회복되는 날 고국으로 이장해줄 것을 부탁했다. 바로 그날 형무소장은 집행문을 읽고 간수는 안 의사의 눈을 가리는 백지 위에 흰 수건으로 둘러맸다.

그리고 3명의 간수에 이끌려 7계단이 된 교수대에 올랐고 목에 밧줄을 걸었다. 보통 시신은 통속에 넣게 되어 있으나 안 의사의 인품을 존경하여 송판으로 관을 짜서 입관시키고 관 양 끝에 십자상을 놓게 해 주었다. 그리고 마차에 실려 형무소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1992년 3월 순국 82주년을 맞아 중국이 개방된 후에 유언대로 안 의사의 유골이나 유토를 조국에 돌려오자며 뜻있는 분들이 여순 감옥 공동묘지를 찾았으나 묘지는 사라지고 군 기지가 되어 버려 아무 것도 찾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그 후에도 뜻있는 33인이 순국 현장에서 순국한 그 시간에 맞춰 추모제를 지냈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일본이 철수하면서 감옥에 모든 자료를 불태워 버렸다. 그러나 공산국가 중국이 개방 이전이라도 안 의사 유언대로 고국으로 이장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소홀한 탓으로 시신이 유실됐다는 안타까운 마음만 가시지 않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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