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친구가 두 번째로 백두산에 갔다 왔다고 전해왔다. 2004년도 문학 단체에서 우리가 영산이라고 말하는 백두산을 20여명이 가는 길에 연변과학대학에서 문학 세미나를 마치고 기숙사에서 하루를 보내고 그 대학 양대인 교수의 안내로 만주 간도땅 벌판을 둘러보기도 했다.

1870년대 간도땅은 북간도 용정 해란강을 중심으로 만주 벌판을 일구어 낸 조선인 유민들에 아픔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 당시 중국과 경계가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북간도 황무지를 개간했던 조선의 유민들,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정착했던 그들이 이제는 중국 관할 하에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용정에서는 김동주 시인이 다니던 학교와 교정의 시비 그리고 유적지를 돌아보고 나서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로이 서 있는 일송정으로 갔다.

그 일송정 바로 밑에 선구자 노랫말이 새겨진 노래비 앞에서 누가 시작했는지 선구자 노래를 은은한 목소리로 합창하면서 한참 동안을 가슴 찡한 느낌으로 서 있었다. ‘일송정’ 한국인들에게 그것은 아련한 대륙의 흔적이다.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이런 선구자의 노래가 없었더라면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없어졌을 이름이다.일송정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해란강도 대부분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이름이고 선구자 노래로 기억을 되살려 내고 있었다. 선구자와 일송정은 고국을 떠난 유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남의 나라 만주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지나가면서 현지 조선족 동포들의 옛 이야기처럼 듣고 보고 지나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어디를 가나 우리민족의 애환의 정서가 우리 발길을 멈추게 했고 그 발길 또한 멀리 고구려 발해까지 닿아 있음을 이곳에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의 가슴 속에서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또다른 소식에 의하면 한국인이 자주 찾는 해란강 주변 일송정도 흉물스럽게 변했다고 한다. 일송정 앞에 세워진 선구자 노래비는 어느 사이엔가 글라인더로 싹 갈아 엎어버리고 그리고 선구자 대신 세워진 ‘용천가’가 들어섰고 그 주변에 한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커피점과 음식점도 폐쇄했다고 조선족은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인이 이곳에 오면 하나같이 선구자 노래를 합창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심술궂은 중국인들이 5년 전 없앤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송정과 선구자는 한국인들에 아련한 흔적으로 용정에 윤동주 시인과 함께 역사적인 장소에서 살아져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가슴 아픈 얘기로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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