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고향에도 현재는 상류에 댐이 만들어졌으나, 당시로서는 제법 물이 많이 흐르던 남대천이라는 강이 있었다. 동네 형들을 따라 냇가 자갈밭에 솥단지를 걸어두고 유리나 싸리나무로 엮은 통발 안에 비리한 된장을 발라 넣고, 족대나 찢어진 소쿠리를 들고 냇가 풀숲을 헤집고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운이 좋은 날은 모래무지, 쉬리, 민물 새우 그리고 피라미 등이 잡혔다.
지금은 불법이지만 6.25 한국동란 직후라 형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다이너마이트(dynamite) 심지에 불을 붙여 큰 바위 밑에 잠수하여 놓고 나오면 굉음과 함께 쏘가리나 메기, 뱀장어도 잡혔다. 그리고 대부분은 배를 눌러 내장을 제거한 후 자갈밭에 걸어놓은 솥에 몽땅 털어 넣고 어느 형네 장독대에서 몰래 퍼온 된장과 고추장을 약간 풀고 근처 밭에서 서리해 온 깻잎이나 풋고추를 넣는다. 1급수인 냇물을 부은 후에 상류에서 떠내려 온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오랜 시간 끓여 걸쭉한 어죽을 만든 다음 체로 치지 않고 큰 가시만 대충 골라내고 쌀이 귀했던 시절이라 찬밥이나 밀가루 수제비를 넣고 한 그릇씩 해치웠다. 그 때는 동네 형들과 옷을 홀라당 벗고 물놀이로 한기가 느껴지면 뜨겁게 달구어진 냇가 자갈밭이나 바위위에 벌렁 드러누워 몸을 따뜻하게 한 다음 다시 멱을 감곤 했다.
우리 조상님들이나 유생들은 산수 좋은 곳을 찾아가 웃통 벗어젖히고 탁족(濯足)하며,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으로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시 한 수 읊고 정자나 나무그늘 아래서 늘어지게 한숨 자는 천렵의 풍류를 즐겼다. 가끔 천렵에는 농악(農樂)이 따르기도 했다. 반면 요즘은 전북 남원의 어탕국수와 충남 금산의 도리뱅뱅이 파주의 청산어죽을 찾거나 밀양 남천강, 강원 홍천강, 인제 내린천 천렵 장소 등을 찾아 먹으려가는 현대판 식도락일 뿐이다. 태종실록 7권(1407년)의 기록을 보면 임금은 완산부윤(完山府允)에게 성지를 내려 회안대군(懷安大君)의 천렵을 허락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왕실에서도 천렵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풍경을 전하는 풍속화에는 양반들의 천렵하는 그림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 18세기 김득신(金得臣)의 <천렵 풍경>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한편 1929년 8월1일자<별건곤(別乾坤, 대중서사학회지>22호에 실린 김진구(金鎭九)의 <팔도기행문(八道紀行文)>을 보면 ‘안주(安州) 명물로는 도야지갈비불고기이지만 그것보다도 삼복중(三伏中)의 닭 천렵인 것이다.’라는 글이 보이고, 또 청천강(淸川江)가의 천렵에는 안주의 여름 하루 동안에 닭의 죽는 수가 수백 마리나 된다고 닭 천렵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村山 智順)이 지은 <조선의 향토오락(鄕土娛樂)>에는 경남지방의 17곳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천렵이 행하여 졌다고 기술하고 있어 일제강점기에도 천렵이 행하여 졌음을 알 수 있다. 천렵할 때에는 바람이 조금씩 불어야 고기가 잘 잡힌다고 한다. 그러나 물고기가 잡히지 않을 경우 “고랑막이”를 한다. 폭이 좁은 곳을 찾아 양쪽에서 돌과 흙을 쌓은 다음 그 안의 물을 퍼내서 고기를 잡아 어죽을 끓였다. 그러나 현재는 육지의 오염원 유입으로 내륙지의 강과 하천의 어족자원이 감소하고 오염되어 피서의 원류인 천렵 장소가 줄어들고 있다니 아쉽다. 천렵의 풍류는 사라지고 있다. 우리 모두의 뿌리인 고향의 강과 하천을 돌아 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