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원로시인으로 존경받는 후백 황금찬 시인이 지난 달 8일 연세 100세로 별세하셨다. 이어 11일에 많은 문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성모병원에서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우리나라 문단의 거목이신 황시인은 고인의 이름을 딴 문학관이 건립을 추진 중이고, 2015년에 황금찬 문학상도 제정되었다.

작년 5월에 문인들이 99세 생일잔치인 백수연을 베풀어드렸고 시집도 40권 째 집필 중에 별세하셨다. 작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우이동 자택에 연락을 드렸더니 횡성으로 요양 차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달자 시인은 황금찬 시인은 곁에 있는 이들을 늘 웃게 만드시고 맑은 영혼을 지닌 영원한 시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문인장에서 이근배 시인은 추모사에서 「지금 이 나라 산천은 꽃이 만발합니다. 선생님의 모국어 사랑, 한글사랑이 꽃과 더불어 활짝 피어나던 이 봄날 아침에 선생님은 홀연히 붓을 놓고 먼 길을 떠나시면서 선생님의 시 「어머님 아리랑」이 이산 저산 소쩍새들이 울음소리로 들려옵니다.」 라고 비통한 마음과 절절한 그리움으로 읽어 내려갔다.

돌이켜보면 10년 전부터 가까운 문인 10여명이 황시인의 무병장수를 바라는 생신축하모임을 두세 번 열어드렸다. 졸수(90세) 전후의 연세에도 활발한 활동으로 문체부와 신문사 주최로 시 낭송회에서 자작시와 조선시대 시간인 「용비어천가」와 「사미인곡」을 줄줄 암송하여 좌중을 크게 놀라게 한 기억이 새롭다.

가끔 초청강연으로 바쁜 일정에도 내가 연금이 없고 후학들을 위해 쫒아 다니신다면서 돈은 얼마 벌지 못한다던 소탈한 웃음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러면서 내 나이에 작품 활동을 하는 것도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은근히 자랑처럼 얘기하시기도 하셨다. 황시인의 강릉사범학교 제자였던 고 신봉승 방송작가는 스승을 위하여 1988년 황시인의 고희연을 맞아 고희기념문집 간행위원장으로 말하시기를 43년간 교단에서 가르침이 수많은 제자들이 이 시대를 활기차게 열어가고 있다고 기고하고 있으며 조병화 작가도 황시인의 고희연에서 「당신은 캡이 잘 어울리오. 당신의 시엔 천진무구의 영혼이 흐르오. 당신은 천성이 시인이오.」라고 축시를 보냈다.

약 10여년 전 필자의 고희 기념 산문집 「가을돛단배」 발간에도 도움을 주신 황시인이셨기에 오래오래 활동하시면서 더 많은 가르침과 건필을 빌었지만 끝내 애석하게도 먼 길을 떠나셨으니 머리 숙여 영면을 기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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