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에 이어 2016년 12월 말에 재차 하노이의 관문인 ‘도이 노이’ 공항에 도착했다. 일본이 베트남을 동남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2015년 준공하여 베트남 정부에 50년간을 무상으로 임대케 한 후 돌려받기로 한 인천공항의 축소판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정말로 ‘도이 머이(개혁개방)’ 정책으로 연 10%이상의 경제 성장을 이룬 하노이는 정말로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기업 3천 개가 진출하여 이 나라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니 자랑스럽다. 과거 월남전의 앙금을 씻고 양국관계가 선린우호 관계로 한국인들을 정말 사랑한다고 한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에 아직도 뜨겁게 반응하고 있다. 하노이 인구가 1천만 명인데 하노이 소재 삼성전자가 직접 고용한 인원이 1백만 명이고 협력업체 등에 고용된 인구가 2백만 명이라니 놀랍다.

그럼에도 베트남 인구의 80%는 논(畓)농사를 하고 있는 농업국가다. 북부의 2모작에서부터 남부의 4모작까지 가능한 축복받은 땅이다. 베트남은 북쪽에도 산이 보이지 않는다. 전체의 60%가 산악지대라고 하는데 산이 보이지 않는 것은 ’찌랑산맥‘이라고 산악 지대가 한쪽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우리 TV에 자주 등장하는 ’집밥‘ 백종원 씨가 한번 뜨면 베트남 전국이 들썩인다고 한다. 동남아에서도 쌀국수의 원조라는 베트남에서 백씨가 쌀국수 레시피를 전하면 원조가 흔들릴 정도라고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다. 베트남인들은 비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주식인 쌀국수는 소화가 너무 빨라 살찔 겨를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이 나라는 변비약을 팔지 않는다. 커피는 브라질 다음으로 수출량이 세계 제2위라고 하나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다람쥐 ’응가(?)커피‘는 맛이 일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여성들은 몸에 밀착하는 ’아오자이(상의가 길다는 뜻)‘를 입는데 신체부위 23곳의 치수를 재서 재단한다. 방목하는 베트남의 돼지고기는 맛이 좋으나, 소고기는 너무 질겨 껌 종류인 ’자일리톨‘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베트남은 오토바이의 천국이다. 그러나 매 10km 과속 시 마다 12만원(월급여 30-40만원)의 교통 범칙금이 부과된다. 그러나 벌칙을 순순히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할인 혜택을 부여하고 있는 여유로움도 있다. 좌회전 깜빡이를 넣고 회전한 후 바로 신호를 끄면 너무 일찍 신호를 껐다고 1만원의 범칙금이 부과되는 경우도 있다. 하노이만도 약 1백만 대 이상의 오토바이가 있는데 이같은 할인 혜택을 통하여 시비 없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은 약 천년 동안 중국의 지배(111-938)를 받아왔고, 또 백여 년 동안 불란서의 지배(1883-1954)를 받아오다 독립했다. 이 후 북쪽의 월맹과 남쪽의 월남이 동족상잔(1964-1975)으로 5백만 명이 사망했고, 비 같이 시원하게 쏟아지는 미군의 고엽제로 2∼3세에 까지 아픈 상처가 대물림되고 있다. 베트남(Vietnam)이라고 발음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한다. 베트남이 아니라 ‘비엣남’인데 우리의 표기법에 따른 것이라 한다. 불란서 통치 기간 중 불 선교사 한분이 베트남의 고유글자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이들의 말을 옮길 수 있도록 알파벳을 도입했는데 F. J. W. Z의 네 글자가 빠진 22자로 베트남어를 표기토록 했다.

하노이-호치민(사이공)까지 1,600km 그리고 해안선이 3,300km로 수산자원도 풍부하다. 2013-2014년 경남기업이 건설했다는 72층의 마천루가 서있는 곳도 하노이다. 하노이 여행의 백미 중 하나는 ‘호안 끼엠’ 호수에서 펼쳐지는 야시장이다. 여기서 일행 중 중개업에 종사하는 여성 한분이 눈 깜빡할 사이에 모바일 폰을 소매치기 당했다. 턱밑까지 물건을 사라고 하는 작전(?)을 잘 방어했지만 윗주머니에 꽂아둔 전화기는 지키지 못했다. 몇 분 후 전화를 했으나 벌써 유심을 뽑은 상태였다. 현지 경찰의 도난확인증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음은 러시아 전문가의 손길을 거쳤다는 ‘호치민(胡志明)’ 아저씨의 무표정한 미이라에 이어 호 주석의 생활관(생가는 중부)을 둘러보았다. 교사-요리사-선원 경력으로 공산혁명가인 호 주석은 체구가 작았지만 돗자리 쿠션으로 짠 그의 침대는 길이가 1.5m 전후로 너무 작고 초라했다. 식사는 1식3찬을 어긴 적이 없다는 설명이다. 호 주석이 사망한 후 남겼다는 유산은 다 떨어진 슬리퍼 세 켤레뿐이었다. 승용차가 3대 나란히 정차되어 있는데 중국과 프랑스에서 기증한 각 1대씩 그리고 한 대는 주석용이었으나 평소 자전거를 타고 승용차는 귀빈이 올 때만 이용했다고 한다.

여행의 화룡정점인 ‘하롱베이(冰下龍)’로 가기 전 ‘땀꼭’이란 곳을 들렸다. 여성사공이 두발로 젓는 2인용 배를 타고 7km정도를 도는 코스인데 잉어, 붕어, 짜깨(가물치)등이 풍부하다. 하롱베이(Harong Bay)는 용(龍)가족이 하늘에서 내려오면서 입으로 토한 보석으로 3천개의 기암괴석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복잡한 구조로 인하여 1280년대 3차례에 걸친 몽골 침입군을 격퇴한 베트남판 한산대첩이 있었다고 한다. 2006년 유람 시에는 대형 가두리에 배를 대고 아열대 ‘다금바리’를 구입하여 유람선에서 회를 뜬 후 즐겼는데 가두리가 보이지 않는다. 유람선 수가 600척으로 늘어나면서 항로에 위협요소가 되자 정부가 철거했다고 한다. 회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다행히 한 섬에 상륙하니 갑오징어를 팔고 있었다. 1kg(두 마리)에 만원이라 고가였지만 너도 나도 사서 쫄깃한 회를 즐기면서 사라진 가두리를 그리워했다. 2017년 정유년(丁酉年) 닭의 해가 밝았다. 닭은 혼자 날지 못하는 새다. 모두 힘을 합하여 웅비하는 한해가 되길 기원 드린다.

저작권자 © 수산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