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문헌상 기록은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1145년에 완성한 <삼국사기> 신라본기다. 신라 신문왕 8년(683년)에 제7관등(官等) 서열의 김홍문의 작은 딸을 왕비로 맞을 때 비단 151수레/ 쌀, 포, 젓갈 135수레/ 조 150수레의 예물 품목에 장(醬)과 함께 젓갈류를 뜻하는 ‘해(醢)’가 기록되어 있어 당시 궁중의례 음식으로 젓갈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후에도 중국 송(宋)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고려인은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사용하던 음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젓갈의 종류가 150여 가지로 담수어, 해산어는 물론 패류와 갑각류까지 이용하여 젓갈을 만들었다. 소금에만 절이는 염해법(鹽法)과 젓갈 재료에 소금과 누룩, 술을 혼합한 독특한 방법의 어육장해법(魚肉醬法)이 있었다. 식해의 제조법도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의약서인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에 실려 있다. 고려시대에 젓갈 제조가 발달한 것은 <도염원 都鹽院>이라는 소금 전매제 정책 때문이다. 백성들에게도 판매할 정도로 소금생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조선조 헌종(憲宗 1827∼1849) 때 정학유(丁學游 1786∼1855)가 쓴 <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에 새우젓을 넣은 계란찌개를 상에 올리면 ‘큰 가마의 밥이 부족했다’는 말에서 역설적이긴 하나 ‘밥도둑’이란 말이 유래됐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산림경제 山林經濟>, <증보산림경제 增補山林經濟>, <음식지미방 飮食知味方>, <규합총서 閨閤叢書> 등 조선시대 관선문헌과 민간문헌에 그 종류와 제조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반면 젓갈은 유럽의 로마제국에도 ‘가룸(Garum)’이라고 해서 온갖 요리의 맛을 돋 구기 위해 사용했다. 현재 이태리와 스페인에서 즐겨먹는 앤쵸비도 멸치젓갈의 일종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케첩도 원래 생선 젓갈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옛날 중국에서는 하사품인 인육젓갈(人肉醬)도 있어 부하들에게 반역이나 국고를 횡령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 상품이었다. 전근대 문헌에 토해(兔醢-토끼고기), 녹해(鹿醢-사슴고기), 어해(魚醢-생선), 탐해(醓醢-소 어깨살), 치해(稚醢-꿩고기)등의 식해도 있었다고 한다. 동아시아 국가들도 고유의 젓갈을 만들어 먹어왔고 역사도 장구하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진 거북이 뒷다리 젓갈, 오리 젓갈, 잉어 젓갈 등 우리가 생소한 이름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특유의 풍미는 우리 민족만의 독창적이고 고유한 감각으로 발효시켜낸 선조들의 지혜로운 전통 음식인 것이다, 여기에 섬세한 손 기술까지 더해져서 진귀한 보물이 만들어졌다. 국내 3대 젓갈 시장으로 강경, 광천, 곰소를 꼽고 있고 저마다의 특색 있는 젓갈이 개발되어 왔다. 반면 어패류 젓갈이 발달되지 않은 나라는 육류저장 식품으로 염장을 한 햄(스팸류)이 발달했다. 지금 우리는 삼저<三低-저염(低鹽), 저당(低糖), 저지방(低脂肪)>와 일고<一高-高蛋白)>시대에 살고 있다. 요즘 젊은 층에서는 젓갈류와 김치까지도 기피하고 있다. 젓갈은 썩음과 삭음의 절묘한 경계의 맛을 감각으로 가려낸 과학적인 발효식품이다. 과용할 필요는 없으나 젓갈은 기다림의 결정체다. 젓갈은 영양가 만점으로 우리 식문화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