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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조조가 사랑한 전복김 민 종 전 수산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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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7.16  03: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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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BC 259-210)는 불로장생을 위해 우리 동해의 전설의 산인 삼신산에 있다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서복을 단장으로 소년소녀 3000명을 파견했으나 49세에 수례 안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17세기 명나라 때 발행된 “오잡조(五雜粗)”라는 문헌에 중국의 세도가나 부자들의 장수와 기호품에 음식에 남방 굴, 북방의 곰발바닥, 서역의 말젓 그리고 동방의 전복을 꼽고 있으나 네 가지 공히 당시에는 구하기 어렵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曹操 155-220)는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평정하고 동탁(董卓)을 토벌한 후 위왕(魏王)이 되었다. 조조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을 제외하고 둘째 조비(曹丕)와 셋째 조식(曹植)의 3부자는 시(詩)에도 능통했다. 조조는 평소에 전복을 좋아했다. 조조는 “단가행(短歌行)”이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는데...산은 높은 것을 마다하지 않고/바다는 깊은 것을 마다하지 않는 법(山不厭高 海不厭深)이라고 노래했다. 조조가 죽은 후 셋째 아들인 조식이 부친을 추모하여 바친 글 “구제선주표(求祭先主表)”에서 선주 즉 돌아가신 임금인 부친 조조가 전복을 무척 좋아해서 자신이 서주(徐州)의 자사(刺史)로 근무할 때 전복을 200개나 구해서 바쳤다는 기록을 남겼다. 조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둘째 조비(曹丕)는 오(吳)왕 손권(孫權)에게 황제의 위업을 과시하는 한편 유화책으로 엄청난 선물을 보냈는데 여기에 전복 1000개가 포함되어 있다는 기록이 “태평어람(太平御覽)”에 기록되어 있다. 셋째 조식은 형인 조비가 왕이 되자 건안 25년(220)을 경계로 전기에는 정치적 포부를 갖고 귀공자 생활을 하였고, 후기 위 문제(魏 文帝, 曹丕) 재위기간에는 박해 받는 번국(藩國)의 왕으로 불우한 생애를 보냈는데 그의 생활상이 시에 반영되어 있다. 그의 시 “미녀편(美女篇)”에 ...한창때에 방안에 틀어박혀 있으니/한밤중에 일어나 길게 탄식한다네(盛年處房室, 中夜起長嘆)라고 했다.

왕망이라는 사람은 1세기 때 한나라에 이어 신(新)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됐지만 주변에서 인정해주지 않고 반란이 끓이질 않았다. 한서(漢書)인 “왕망열전(王莽列傳)”에는 걱정이 심하여 술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고 음식은 아예 삼키질 못했다. 다만 유일하게 입에 댄 음식이 전복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송나라 때 미식가로 유명한 소동파(蘇東坡)는 전복을 먹고 그 맛에 반해 ‘전복의 노래’라는 뜻의 ”복어행(鰒魚行)“이라는 시를 남겼다. ‘고기와 영지, 석이버섯 요리 수는 많지만/식초 바른 전복 회 껍데기 속을 장식하니/귀인들이 그 맛을 진귀하게 여기는데/기름 살짝 바르면 맛이 더욱 오래 간다네’라고 노래했고, 소동파는 전복 중에서도 맛있기로는 발해만(渤海灣)에서 잡히는 전복이 으뜸이라 했다. 따라서 발해만을 포함한 우리 서해바다에서 나오는 동방의 것을 최고로 꼽았다.

남북조시대 송나라 장군이자 황제의 사위인 ‘저언회(楮彦回)’는 표기장군(驃騎將軍)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청렴결백에 가난을 면치 못했다. 어느 날 전복 30마리가 생기자 주위에서는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살림에 보태라고 권유했으나 그는 친지들을 불러 다 먹어 치웠다. 라고 남사(南史)의 ‘청백리열전(淸白吏列傳)’에 나온다. 선조 때 세자의 스승을 지낸 유몽인(柳夢寅)은 야참으로 임금님이 하사한 전복 한 접시를 들고 ‘하늘나라의 진수성찬을 내어주신 임금님 총애에 눈물로 갓끈을 적신다.’라고 노래했다. 조선의 역대 왕 중 가장 오래 산 임금이 18세기에 팔십 삼세의 수를 누린 영조(英祖)다. 어머니가 천한 무수리였기에 신분의 열등감에 빠졌고, 형인 경종(景宗)을 독살하고 왕이 됐다는 풍문으로 시달렸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복통, 소화불량에 시달린 영조의 짧은 입을 달래준 것이 전복과 송이 그리고 고추장이라고 했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송시열(宋時烈)이 전복 따는 과정을 기록에 남겼는데 어민들이 전복을 채취할 때는 목숨을 내놓고 깊이가 100길이나 되는 바닷물에 들어가는데 재수가 좋으면 한두 개 따올 뿐이고, 사람마저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했다. 그렇다보니 세종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기건(奇虔)’ 같은 이는 아예 전복을 먹지 않았다. 제주 목사(牧使)시절 어민들의 물질하는 고생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가렴주구도 심하여 황금빛 나는 것은 꼬치에 꿰어 벼슬아치들에게 올려 보내고 해녀들 바구니에는 석결명(石決明 껍데기)과 그녀들의 한이 가득했다고 노래했다.

전복(全鰒, abalone)은 귀조개(ear shell)라고도 한다. 자산어보에 복어(鰒魚), 포어(鮑魚)라고 했고 본초강목에는 석결명(石決明) 또는 구공라(九孔螺)라고 쓰고 있다. 건제품으로는 명포(明鮑) 또는 회포(灰鮑)라고 한다. 일본에서는(あわび, 鮑, 鰒)라고 하고 중국 역시 鰒(fu), 全鰒(quanfu), 鮑魚(baoyu)라고 한다. 전복은 버리는 부분이 없다. 내장까지도 훌륭한 요리(このわた)의 재료가 된다. 고단백질, 조지방, 탄수화물, 회분, 각종 비타민 군과 나이아신이 풍부하여 원기회복과 지친 심신을 치유하는데 전복을 능가할 수산물이 없을 정도로 ‘패류의 황제’라고 한다. 조선시대 제주도로 발령받은 관찰사는 한양으로 보내야 할 공물 중 전복 때문에 가장 고심했다. 지금의 완도 군수는 지천으로 생산되는 전복을 보면서 무슨 고민을 할까?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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