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鷺梁津)은 한강변의 삼전도(三田渡), 금강연안의 웅진(熊津) 및 낙동강 유역의 삼랑진(三浪津)과 같이 나룻배가 발착하는 도선장(渡船場)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진취락(渡津聚落)이다. 노량진 동쪽 언덕 위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참형을 당한 사육신묘가 자리하고 있는 충절의 역사가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1200만 서울 시민의 먹거리를 책임진 노량진수산시장이 있다. 도쿄의 ‘쓰기지어시장’이 400년, 뉴욕의 ‘퀸즈어시장(전 플턴어시장)’의 역사가 180년이나 된다. 여기에 비하면 노량진어시장의 역사는 90년쯤으로 역사가 짧다. 그럼에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오늘에 이르렀다. 일제 강점기인 1927년 경성수산물㈜로 출발한 어시장은 1945년 8.15 직후 서울수산시장㈜를 거쳐 1983년 노량진수산시장㈜로 바뀌었다. 이 후 1988년 원양회사인 삼호물산㈜로 운영권이 넘어가고, 동년 12월에 한국냉장㈜로 경영권이 옮겨진 후 2001년 12월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의 자회사인 노량진수산시장㈜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시장이 도심에 남게 된 것은 유통구조개선을 통한 도시민에 대한 신속한 어류단백질 공급과 공정거래 그리고 유통질서 확립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수협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다. 정부는 낡고 위생시설이 노후화된 구 시설을 대체하여 2천여억 원이 넘는 예산을 들여 2016년 3월 새 시장을 준공했다. 그러나 기존상인들은 새로운 시설로의 입주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신축 어시장의 구조적인 문제와 환기, 배수문제 그리고 할당된 이용면적은 구 시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협소한 반면 높은 임대료 등을 지적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더불어 지난 4월 4일 비대위와 수협 간의 충돌로 감정의 골만 깊어졌다.

부산의 자갈치어시장과 더불어 우리나라 양대 어시장의 한 축인 노량진수산시장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여 이용하는 시민들의 불편이 막심하다. 미국 뉴욕의 맨해튼 동쪽에 1822년 개장한 ‘플턴 피쉬 마켓(Fulton Fish Markrt)’은 2005년에 퀸스(Queens) 지역(Bronx Hunts Point)으로 옮기기 전까지 두 세기 동안 뉴욕 시민들에게 어류단백질을 공급했다. 연간 10억 달러 상당의 매출을 올리는 미국 최대 어시장으로 뉴욕을 포함한 미 동부지역에 수산물을 공급하며 60여개의 도매상들에 의거 체계적으로 운영됐다. 이 시장도 개장 초기 뉴욕 거주 한인들이 수산물을 사기 위하여 차를 가지고 어시장을 방문하면 80% 이상 시장을 장악한 이탈리아계 마피아에 의거 타이어가 펑크 나고 위해를 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물건을 구입하던 한인이 구타를 당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자 뉴욕지구 어물상인회를 1977년 1월에 창립하고, 시 당국에 탄원서를 내는 등으로 대항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도매시장 진출에는 실패했으나 한인들은 뉴욕 인근에서 800여개의 수산 소매상을 운영하는 등 뉴욕시 수산물 소매업을 90%까지 장악하고 막강한 영향력으로 도매상인들과 대항하는 신화를 썼다.

넓이 23헥타르로 도쿄 돔의 일곱 배에 가까운 도쿄 ‘쓰키지어시장’을 꽉 메우고 있는 것은 8개 도매업체와 1,000여개에 이르는 중도매업자들이다. 이곳에 새벽 3시면 불이 대낮같이 밝혀진다. 5시에 시작되는 경매는 7시면 끝난다. 쓰키지어시장의 역사는 약 4세기 전 에도(江戶)시대부터 시작됐다. 에도 막부의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는 왕궁에 원활한 어류 공급을 위해 오사카(大阪)의 어부들을 동원하여 이들에게 특혜인 조업권을 주면서 생선을 헌납하게 했다. 이 어부들은 할당된 생선을 헌납하고 남은 생선들을 니혼바시(日本橋) 주변에서 팔기 시작했는데 이를 계기로 어시장이 형성되어 오늘날 쓰키지어시장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오사카 어부들로부터 생선을 구입하는 돈야(問屋, 중개매매업자)와 돈야에게 생선을 구입하는 도매인, 도매인에게 생선을 구입하는 소매상 그리고 소매상에게 생선을 사는 서민이라는 구조가 형성됐다. 당시 니혼바시는 물길이 발달하고 길도 정비되어 있어 물류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니혼바시 어시장은 1923년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같은 해 해군성의 부지를 빌려 임시로 어시장을 개설하였다가 1935년 매립지인 지금의 장소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쓰키지어시장은 세계의 참치가 모이는 곳으로 한 마리(200kg)에 1억5000원에 팔린 기록으로도 유명하다. 세계 참치생산의 1/3을 일본에서 소비한다니 그 소비 규모가 놀랍다. 하루 입장객 4만 명이 드나드는 이 어시장은 유명세를 타 도.소매상인 말고 관광객(일일 120명 제한)이 몰려 경매와 물류수송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 그러나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후쿠시마)의 여파로 수산물 기피현상이 일면서 관광객의 발걸음은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산물의 일일 거래액은 약 170억 원으로 전 세계 어느 곳의 수산시장도 쓰키지를 넘볼 수 없고, 일본인들의 사랑을 전폭적으로 받고 있다. 그러나 아픈 기억도 있다. 1954년 3월15일 쓰키지 시장에는 제5후쿠류마루라는 원양 참치독항선이 참치를 싣고 입항했다. 그러나 이 선박은 태평양의 마샬군도 근해에서 조업 중 비키니 섬에서 실시한 미국의 수소폭탄실험에 피폭되었다. 따라서 피폭된 수산물의 경매는 중단되고 쓰키치 인근에 전량 매몰 처리됐다. 이후 사람들은 그곳을 “참치무덤(原爆まぐろの塚)”이라고 불렀다.

이 외에도 역사가 300년이나 되는 독일의 함부르크 어시장과 19세기 초에 개설된 센프란시스코 어시장 등도 오늘날의 어시장으로 발돋움하기까지 어려운 고비를 수없이 넘었다. 노량진 수산시장의 진통도 수협과 도매상인 모두 잘해보자는 목표는 같다고 본다. 노량진수산시장에는 젓갈을 팔망정 통 큰 기부로 사회에 큰 울림을 던진 류양선 할머니도 있다. 시장. 도매상, 소매상 및 소비자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활력과 힘 그리고 생명력이 넘치는 노량진의 쓰키지어시장을 지향하는 함성이 곧 울려 퍼지길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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