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양화면 입포리에 ‘입포나루’라는 안내판과 회상시비(回想詩碑)가 서있다. 배들의 접안이 용이한 입포(笠浦)나루는 금강변 최고의 포구로 6.25 직전까지도 강경의 갱갱이 포구에 비교될 만했으며, 많을 때는 1,500여척의 어선이 드나들었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하루 평균 2백∼3백 척의 황포돛배가 곡물과 생필품을 실어 나르기 위해 접안했으며, 주거래 품목은 조기를 비롯한 어류와 농산물 그리고 소금이었다. 지금은 포구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당시는 부여군에 속한 포구 중 제일 컸다.

“어여디어 어여디어차 칠산 연평 있는 고기는 우리 배 그물로 다 들었구나…(중략) 우리 집 서방님 명태 잡이를 갔는데 바람아 광풍아 석 달 열흘만 불어라 어여디어 어여디어차”로 시작되는 갓개의 뱃노래는 지금은 잊혀가는 노래 가락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개는 일본과 신라는 물론 당나라와 서역에 이르기 까지 문물교역의 가장 큰 길목이었다고 동네 어른들은 기억하고 있다. 입포나루는 지형자체가 삿갓모양과 흡사하다고 해서 갓개, 관포라고 부른다. 갓개는 백제시대 훨씬 전부터 우리 선조들의 생활터전과 내륙 수운이 발달한 금강을 모태로 태동되었다. 이후 고려와 조선조를 거치면서 갓개는 장항항을 통해 내륙에 들어서는 관문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안흥항, 장항항, 웅포와 함께 충남의 4대포구로 손꼽았다. 특히 일제 말기에는 여산8군(부여, 예산, 청양, 서천, 보령, 논산, 공주 등)의 곡물이 군산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반출되는 공출항의 중간 집산지 역할을 했다. 현재의 양화면사무소 자리에는 순사주재소와 군산곡물검사소 입포분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한편 해방 후 까지도 강경항에 버금가는 어항으로 천여척의 어선이 만선기를 휘날리며 입항하는 등 마을 전체가 조기 썩는 비릿한 냄새로 뒤덮였다. 이와 같은 전성기에는 동네 개도 지전(紙錢)을 물고 다닐 정도로 풍성한 포구였다. 갓개가 포구로서 기능을 수행한 개항 시기는 1890년으로 1885년 부여군 지곡면 남당진에 살던 김해 김씨가 최초로 입촌한 직후라고 한다. 반면 갓개가 크게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천연적으로 선박의 접안이 쉬운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구를 중심으로 황포돛배가 항시 강 포구 전체를 뒤덮어 장관을 이루었다. 더불어 6.25 직후까지도 중국과의 밀수품 거래도 활발하여 떼부자가 많이 탄생했다. 중국 다랜(大連)으로 소금을 수송하던 선박이 귀국 시에는 중국 비단을 가져와 비싸게 거래했다. 당시 주민들은 연평도에서 지천으로 잡혀온 조기는 눈알만 빼먹고 버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흑산도 홍어도 많이 들어왔다.

입포나루에는 5일장(3일과 8일) 정기 시장이 열렸고, 어선이 입항하면 그 때마다 정기 시장과는 별도로 생선시장이 개설되었다. 주거래 품목은 조기, 홍어를 비롯하여 갈치, 새우젓, 상어, 명태 등이었고, 출시 지역은 천안, 공주, 광천 논산, 서천 익산 등지였다. 입포나루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술집으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당시 주민들 사이에선 부여경찰서장보다 양화파출소장을 더 부러워했다고 전한다. 흥청망청 향락에 빠져 놀다가 돈이 떨어지면 나루에 떠 있는 황포돛대만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모든 것이 통했다. 더구나 일제말기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될 때에도 이곳 갓개만은 일경(日警)들이 돈을 받고 묵인해주는 특별한 혜택을 누린 곳이었다. 또한 할 일이 없으면 갓개장에 가서 소금 한통 짊어지고 나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는데, 당시 소금은 전매품으로 비싼 가격에 매매 된데서 비롯된 말이다.

이때까지 갓개의 수산물이나 농산물 그리고 소금은 전부 6명의 대자본 객주들에 의하여 선주, 상인, 노동조합의 인부들과 연결되어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객주제도는 1943년 어업조합이 설립되면서 한동안 각종 경매를 놓고 갈등하다가 1953년 무렵에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 개인 객주들에게 출어 선수금을 받아 출어한 어선의 어획물 판매권은 객주들이 좌지우지했다. 한편 어업조합을 통한 금융으로 객주들의 고금리 등의 피해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초기 어업조합의 금융, 위판 등의 제도적 미비로 출어자금 대출 시기를 일실하거나 제한된 금액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어업조합은 정착되지도 못한 체 1961년 5월 16일 이후 없어졌다. 결과적으로 객주와 어업조합의 쇠락 그리고 바다와의 단절은 어업을 연안어업 위주에서 내수면 어업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객주업에 종사하던 일부는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는 강경-군산 간 여객선 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갓개의 쇠퇴는 상대적으로 강경항의 융성을 가져왔다. 따라서 성어기에 참조기외의 여타 어획물은 대부분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번성했던 갓포는 내수면 어업과 농업으로 변신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조기 자원이 급감한 후 갓개는 병어가 많이 잡혀 옛 영화를 찾으려는 노력도 했으나 인접 군산에 건설된 알코올 주정공장에서의 온배수 방출로 수온이 상승되어 어장 환경이 변화되었다.

한편 강경포구의 기능은 활발해지고 확대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갓개는 쇠락의 속도가 빨라졌다. 더욱이 ‘60년대 이후 금강 하류와 육지로부터 토사가 유입되어 쌓이는데도 준설하거나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1990년 서천과 군산 간 금강 하굿둑 완공은 금강 하구 연안의 입포, 웅포, 나포 등의 포구 기능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어업의 쇠퇴는 생계수단을 어업에서 농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여기에 샛강의 흥망성쇠가 갓개의 젖줄이고 번성과 직결된다던 샛강도 택지 또는 농지로 매립되고 말았다. 입포나루 전체를 꽉 매운 황포돛배는 추억이 되었고, 조기와 홍어가 넘쳐나던 갓개는 부여의 한적한 오지 마을이 되었다. 2013년 부여군은 금강 살리기 사업으로 입포나루를 조성하고 유람선 관광 사업 및 2014년 농촌 거점 개발사업 기본계획에 따라 ‘갓개, 잊혀진 것의 부활’이라는 야심찬 계획이 추진하고 있어 갓개의 내일을 보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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