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3-5세기경 중국문헌 ‘이아(爾雅)’라는 서적에 지(鮨)라는 글자가 나오는데 지(鮨)자는 생선으로 만든 젓갈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신문왕(3년,683년)이 왕비를 맞이할 때 납폐 품목에 쌀, 술, 육포와 더불어 ‘해(醢, 젓갈)’가 등장한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제조방법에 따라 어육장해(魚肉醬醢) 및 지염해(漬鹽醢)로 젓갈과 육류로 만든 젓갈의 기록이 있다. 또한 삼국지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송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 그리고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 등에도 생선해(魚醢)와 수조육류(獸鳥肉類)도 젓갈을 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젓갈이 가장 발달했는데 16세기 미암일기(眉巖日記)에는 젓갈과 식해가 24종이나 등장한다. 뒷산에 독(甕器)을 닮은 바위가 있다 하여 이름 붙여진 독배마을 옹암리(甕岩里)는 백제 시기에는 결기군, 신라 때는 결성군, 고려와 조선 말기에는 보령 관할이었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옹암리라 하여 홍성군 광천면에 편입되었다가 읍 승격으로 광천읍 옹암리(浦口)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옹암리의 새우젓 장은 고려 초부터 개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1928년부터 3일과 8일에 5일장으로 고정되었고, 충남 관내 강경장, 아우내장과 더불어 3대 장을 이루었다.

한편 물물교역도 크게 이루어진 이곳은 고려시대 왜구들의 잦은 침략으로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조정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농사를 짓게 했는데 지금도 둔전(屯田)이란 지명이 남아있다. 옹암포는 군산의 개항과 철도의 개통으로 충청남도 내 산업의 중심지로 부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포구이자 광천(廣川)의 관문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62년 옹암리 갯고랑이 오래전 금광에서 흘러나온 사금채취와 육지로부터 흘러드는 토사로 인하여 뱃길이 혼란스러워졌고, 1970년 12월 태안반도와 안면도 사이의 연육교가 완공되고 동력선이 보편화되는 등 교통의 발달로 사람들이 서산이나 대천장(場)으로 옮기면서 옹암포가 쇠퇴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계기는 1997년 보령방조제 물막이 공사로 인근 고대도, 안면도, 장고도. 원산도 등 도서지역의 100∼150척의 어선과 장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4년부터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금광폐광의 굴속에 새우젓을 보관하고 숙성시킴으로써 광천독배 토굴 새우젓이 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특별한 저장시설이 없던 시절 잡은 새우를 ‘조랭이’라 불리는 항아리에 담아 저장함으로써 절반은 썩혀서 버려졌다.

한편 광천 아줌마들의 ‘고무다라(대야)부대’는 장항선 열차에 새우젓을 담아 천안, 청주, 조치원 등의 내륙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광천 새우젓을 알렸다. 봄에 담은 것은 춘젓, 5월의 오젓, 6월의 육젓, 7.8월의 자젓(잡젓), 가을의 추젓, 겨울의 동백하젓과 2,3월의 새우로 담은 곤쟁이젓 그리고 돗데기젓 등으로 부른다. 김장철에 가장 수요가 많으나 조리나 반찬으로 연중 애용되는 젓갈이다. 옹암포의 포구가 막히고 배가 들어오지 않았으나 광천의 토굴새우젓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광천의 경기는 활기에 찼다. 당시 ‘관청이 많은 홍성에서 아는 채 말고, 알부자 많은 광천에서 돈(錢)자랑 말라’라고 했고, 최성기인 30년대는 유곽이 많이 들어선 호경기에 빗대어 ‘쥐새끼도 술에 취해 비켜가지 않는다’고 했다. 광천의 토굴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인천의 소래포구와 목포신안의 새우 생산지에도 보관용 땅굴이 생겨나면서 전성기 전국 생산량의 약40%를 점했던 옹암포 새우젓의 수요도 줄었다.

식염함량이 약 20%인 새우젓의 발효과정에 작용하는 미생물의 분포는 발효 30∼50일까지 계속 증가한 후 서서히 감소하게 된다. 미생물이 분해하는 단백질 분해요소인 프로테아제가 젓갈의 숙성과정에서 맛을 결정하게 된다. 일정한 온도에서 유지되는 토굴에서 발효되는 젓갈은 새우의 가수분해 산물인 유리아미노산과 비단백질소화합물, 핵산물질이 조화를 이루어 인위적으로 온도 조절한 저장 새우젓과는 다른 특이한 맛을 낸다. 이렇게 생산된 토굴 새우젓은 소화 흡수가 용이한 고단백 식품이 된다. 옹암리 독배마을에는 바위산의 활성암반을 파고 들어간 토굴이 40여개가 있다. 해풍과 맞부딪치며 외형적으로 통풍요건도 매우 우수하여 토굴 연중 온도가 14∼15도를 유지하고 습도도 85%를 넘는다. 새우젓을 담은 수 천 개의 드럼통에서 새우젓이 숙성되는 최적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새우젓을 사기 위해 서울, 인천, 대전의 큰손 젓갈 상인들이 들락거렸고 전국의 젓 값 형성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옹암포는 예로부터 풍수지리상 많은 사람이 영화를 누릴 곳(男有萬年榮華之地)이라 했다. 그러나 당(唐)나라 불교전래의 창구로 안흥항(安興港), 회이포(回伊浦)와 함께 오랜 기간 풍요를 누리던 옹암포도 성주사(聖住寺)라는 유명 사찰만을 남긴 채 세월의 변화에 적응해야만 했다.

독배마을은 새우젓 가공과 저장업을 하면서도 농업을 생계의 근간으로 하고 있다. 1990년 9월 23일자 매경(每經)의 한국의 장터라는 제하에 ‘광천읍은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지만 오젓, 육적, 추젓 우리네 입맛 찾아 상점마다 성시’라는 기사가 보인다. 지금도 서울에서 매년 개최되는 ‘마포나루 새우젓 축제’에 광천독배 토굴새우젓과 강경 새우젓이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새우젓은 발효과정에서 생성되는 키틴올리고당은 면역증가 및 콜레스테롤을 저감하는 효과가 있고, 새우의 타우린은 혈압을 낮추고 피로회복과 근력강화에 효과가 있다. 더불어 새우젓에 들어있는 베타인은 간 기능개선, 항혈당작용과 항암효과도 크다고 한다. 지금도 광천의 젓갈 상인들은 타 지역 새우젓과 비교자체를 언짢게 생각할 정도로 토굴새우젓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다. 광천독배는 토굴새우젓에 옛 영화를 담아 풍요로운 내일을 기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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