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군에 속한 몽대포(夢垈浦)는 망미포(望美浦) 또는 경포(鏡浦)라고도 불리던 태안군 남면의 조그마한 어촌마을 포구다. 그러나 일찍이 중국과 교역을 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인접 안흥항(安興港)을 거점으로 한 조공선이 기항지로 삼던 포구이기도 했다. 몽대포는 몽대 문씨(文氏)들의 집성부락이 있고 그들에 의해 약450여년 전 개항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 인조 대에는 세곡(稅穀)운반선이 드나들던 포구로 자리 잡았다. 경상.전라지방에서 안흥항으로 향하던 세곡운반선이 황천 항해를 잠시 피하러 몽대포에 들리던 것이 일상화됐다. 특히 광천. 부석일대의 작은 세곡운반 범선들은 몽대포 일대에서 좌초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탐관오리들은 세곡의 부정 착복을 위해 일부러 좌초 파선시키는 경우도 허다하여 역설적으로 몽대포를 융성케 했다. 따라서 몽대 앞바다에서 건저 낸 쌀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직미개떡’이 몽대포의 명물이 되었다. 이후 몽대포는 일제 강점기에 최대의 풍요를 누렸다.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된 어업 기술의 발전으로 어항으로도 발전할 수 있었다. 당시 인천에 살던 일인(后藤正次郞)이 몽대포 앞바다 해저가 평탄하고 어족자원이 풍부한 것을 알고 발동선 형태의 초기단계 기건저인망 어업을 시도하여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후 한인들도 그물(網)어업을 시작하여 몽대포구의 번성기를 구가하였다. 그 결과 민가라곤 단 한 채밖에 없던 인근 몽산포(夢山浦)에 통나무로 만든 가건물 술집이 30여 곳이나 들어섰다고 한다. 한편 일인들은 어업 외에도 인근 거아도(居兒島)에 자연산 뽕나무가 많음에 착안하여 양잠(養蠶)을 시작했고, 자연산 약초 채취에까지 손을 대 큰 부를 축적했다. 이로 인해 몽대포의 최전성기를 견인하였다. 더불어 몽대포는 40년대 초까지는 300여 척의 어선들이 드나드는 큰 포구의 역할을 했다. 일인들은 어획한 도미와 삼치, 민어 등과 잠사(蠶絲)를 자국으로 반출했다. 반출하고 남은 어류는 어류저장법이 개발되기 전이라 많은 양을 썩혀서 버렸고, 지천으로 잡힌 꽃게는 부패하는 경우가 허다하여 논의 밑거름으로 사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 갈치는 무료로 나누어 주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풍요 속에 살았다고 한다. 한편 궁하면 통한다고 얼음에 채우는 빙장법(氷藏法)을 고안하게 되어 잉여 어획물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리의 기선저인망어업은 공식적으로는 1951년 2월 ‘UN대한민간구제사업(CRIK원조)’으로 일본에서 50톤급 기선저인망어선 36척을 도입하였다. 이후 1953년 ‘UN한국재건단(UNKRA)’ 사업으로 10척 그리고 1955년 “FOA(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 사업으로 3척이 도입되었다. 이후 대형기선저인망은 1966년에 이르러 대일청구권자금 제1차년도 자금으로 44척(국내건조 28척, 도입 16척)이 건조 또는 도입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몽대포의 기선저인망 어업은 일본인에 의한 자원 수탈이지만 우리의 그물어업기술 향상에도 기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몽대포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이어서 찾아온 6.25 동란을 겪으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더욱이 태안반도에서 10리가량 돌출하여 중국의 산동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교역이 성행했고, 규모가 클 뿐더러 천혜의 항만 조건을 갖춘 인근 안흥항(安興港)으로 포구의 기능이 급속히 옮겨지자 몽대포는 활기를 잃고 한적한 어촌으로 전락했다.

안흥항의 본래 이름은 난행량(難行梁)이었다. 난행량이란 일대의 조류가 험악하여 중국에 조공을 운반하던 선박들과 국내의 세곡을 운반하던 목선들이 항해기술의 미숙과 탐관들에 의한 인위적인 좌초로 곧잘 침몰하는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안흥량(梁) 동북쪽 지령산(地靈山)위에 항로의 안정을 기원하기 위하여 안흥사(安興寺)가 지어진후 그 이름을 따서 안흥항으로 개칭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조시대의 조운(漕運) 규정에도 조운선이 안흥량을 통과하고자 할 때는 항로에 구장정이라는 암초가 있으니 원산에 정박하여 선체를 사전 점검하고 이상 유무를 확인한 후 출발해야 한다고 하여 당시의 항행기술로는 이 지역 통과가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고려 인종 12년(1134년)의 운하건설 계획과 공양왕 3년(1391년)에 항로 굴착사업을 시도했으나 심한 조수간만의 차이로 실패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이조 인조 때까지도 운하계획은 시도되었으나 시행착오만을 겪었다고 한다. 이 후 임진왜란으로 이름이 알려진 명나라의 이여송과 현지관찰사에 의하여 항로가 개선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안흥항은 꽃게와 해삼 등을 조정에 진상하였으며, 안흥첨사는 어민들의 세(稅)부담을 감안하여 현물로 대신하여 납부하게 해달라고 영의정(金左根)에게 진상문을 올려 세금을 현찰이 아닌 복어로 대신하던 현물세 항구이기도 했다. 해방 직후엔 격렬비도(格列飛島)를 거처 중국의 산동반도까지 밀수도 성행했던 항구이기도 했다. 이런 사유들로 인해 안흥항이 비대해지고 활발해지자 몽대포의 기능이 급속히 흡수되고 말았던 것이다.

1970년 3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어항 연차 준설 6개년 계획’ 제하에 24억원을 투입하여 74개 어항을 준설한다는 게획에 몽대포항이 포함된 것을 볼 때 전성기에 토사매몰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몽대포항에는 길이 약 450m의 방파제가 있다. 1-2월에는 굴이 제철이라 방파제에 부착된 자연산 굴 채취가 한창이다. 방파제 위에서의 낚시도 쏠쏠하다. 몽대포에서 장곡리 사이 덕바위, 작은덕바위의 갯바위에서의 강성돔, 우럭, 농어 등의 루어낚시는 조사(釣士)들을 흥분하게 한다. ‘몽대포 쭈꾸미’는 서울 한복판에서도 알아주는 인기 품목이다. 몽대포항 남서쪽에 위치한 안목섬은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바라보는 지점에 따라 봉우리의 수가 달라 보이고 그 형상이 아름다운 자연경관이다. 몽대포 주민들은 영화롭던 옛날을 회상하며 낚시관광사업을 돕고 농업에서 생계를 찾고 있다. 그러나 바다위에 펼쳐지는 몽대포의 석양을 바라보며 내일의 바다를 결코 잊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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