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인신문
칼럼김민종 칼럼
수군절도사영의 오천항에 키조개 군단김 민 종 전 수산경제연구원장
수산인신문  |  webmaster@isusanin.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6.01.22  16:02:1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충남 태안반도 남쪽 천수만(淺水灣)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오천항(鰲川港)은 세조 때부터 충청수군절도사영(忠淸水軍節度使營)이 설치되었다가 고종말엽인 1896년 절도사영이 폐지되기까지 이조 약 430년간 조선 전체 수군의 1/3을 차지하는 수군의 본영이 있던 역사적인 항(港)이다. 효자도, 월도 등 60여개의 유.무인도가 방파제 역할을 하여 폭풍우가 몰아쳐도 선박의 안전이 보장되고 입출항이 가능한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오천성(忠淸水營城)은 중종 5년(1510) 조선 3대 수군절도사로 이장생(李長生)이 부임하여 16년간에 걸쳐 축조하였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충청수영과 그 산하 속진에 배치된 군선은 142척에 수군 8,414명이 있었으며 최전성기에는 본영에만 군함 90여척과 수군 5,300여명이 주둔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렇게 큰 규모의 수군이 주둔한 오천항에서는 오랑캐가 침범할 때에는 북으로 출병했고 고려로 넘어오면서 왜구의 침범이 잦아질 때에는 남으로 진군하는 북소리가 요란히 들리던 곳이기도 했다. 특히 중.일전쟁(1937-1945)이 한창일 때에는 대형 일본군함 18척이 정박한 수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8백톤급 동력선이 왕래하든 상거래 항이었다. 한편 백제 때는 회이포(回伊浦)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정절의 상징인 도마부인 사당이 있는 곳이다. 신라 때에는 당나라를 상대로 소규모 교역 창구 역할도 했다. 1616년에는 군산 목포 간 정기여객선이 취항하면서 오천항에 들리기도 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기간(1863-1873) 중 오천항으로 입국한 천주교 ‘안토니오’신부 등 5명이 인접 갈매 못에서 순교한 천주교 성지로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선조 25년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자 오천 수군영의 수군이 전라우수영군과 합류하고 이순신장군 휘하에서 각종 해전에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 진주대첩에서도 오천수군은 진주성을 지키다가 전원 옥쇄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특히 남해 특히 선조 30년 칠천량 해전(1597)에서는 충청 수사 최호(崔湖)가 통제사 원균(元均)과 연합해서 싸우다가 전사한 바 있다. 그러나 430년간에 걸쳐 330명의 절도사가 재임한 바 있었으나, 1896년 7월 수군절도사영이 폐지되면서 쇠락을 걸어오던 중 오천에 있던 군청 소재지마저 1914년 보령으로 이전되면서 한적한 어촌이 되었다.

이(李)수군절도사가 해발 400m의 구릉성 야산(13,700m3)에 거북이 모양으로 축성했던 둘레 1,650m에 걸쳐 위용을 자랑했던 오천성(중종 1510-고종 1896)도 옛 영화는 무너지고 잡초더미에 형체가 묻히고 일부 건물과 몇 개의 석비만이 남아 옛일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오천은 예로부터 보령 북부권의 삶과 생활의 중심지로 모든 길은 오천과 통한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주포, 주교, 청소 등 오천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만 세 갈래나 된다.

한편 2000년 천북면과 오천면을 이어주는 보령방조제가 완공되었다. 방조제 완공 전에는 남당항이나 천북항에서 오천항으로 오려면 광천 시내로 나가야 했으나 이제는 보령방조제만 넘으면 천북항이고 남당항이다. 이런 가운데 1960년대 중반 천수만 일대에 지중해 담치가 아닌 자연산 홍합의 집단 서식지가 발견되면서 어민들의 소득원이 되었다. 잠수기를 통하여 잡아 올린 오천 홍합은 그 품질이 우수하여 부산지역민들의 제사상에 올려 진다고 하며 오천 홍합의 풍흉이 전국 홍합 시세를 좌우하기까지 했다니 대단하다. 그러나 1981년 보령화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온배수의 영향과 50여 년 간 체포에만 치중한 결과 홍합자원이 크게 줄었다. 이 후 소라와 꽃게가 홍합의 공백을 메워주었다고는 하나 역부족이었고, 사실은 키조개 생산지로 옛날의 영화를 되찾고 있다.

키조개는 바다의 쇠고기라는 이름과 함께 전복, 대합과 더불어 3대 고급패류이다. 1990년대 오천항 주변은 갯벌은 키조개 군단이 점령하여 활기가 넘쳐났다. 그해 생산량은 약 4000톤 전후로 전국 생산량의 60∼70%를 점유하였고, 그 중 생산량의 70%는 국내에서 소비되고, 나머지 30%와 키조개 관자(貝柱, かいばしら)는 이노신산과 글루탐산이 풍부하여 가열하면 영양이 파괴되므로 거의 전량 회(膾)문화가 발달된 일본으로 수출된다. 1일과 6일에 오천장을 찾으면 키조개 양념구이와 갱개미(가오리, 간재미)무침 등 각종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 잠수기어업으로 채취한 키조개(체포 금지기간 7,1∼8,31)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산물이고,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홍합 역시 인기가 높다.

키조개는 양식이 초보단계로 자연산 체포 금지기간 외에 TAC(총어획허용량)대상 품종에도 포함되어 관리되고 있다. 키조개의 명칭은 농가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는 도구인 키(箕, 챙이)의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부쳐진 이름이며, 키조개 100g당 아연의 함량이 12.8mg으로 높아 아연의 보고라 하고 상처회복, 면역력 향상, 만성염증 질환, 당뇨예방에 효과가 크다고 한다. 더욱이 칼로리가 낮아 대표적 다이어트 식품으로 평가된다. 매년 4∼5월에 오천항 키조개축제가 2004년부터 열리고 있다. 키조개는 지상파 TV 프로인 ‘한국인의 밥상’에서 국수, 장조림, 전, 회무침 등으로 소개된 바 있다. 옛날 명절에는 각 고을 수령방백들이 오천성을 찾아왔었다. 반면 지금의 오천항은 바다낚시의 천국으로 주꾸미와 갑오징어 낚시 매니아들이 몰려들고 있다고는 하나 옛날 명성을 회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71년 12월 21일 ‘국가지정항’이 된 오천항을 국제항으로 견인하여 공주, 부여, 태안을 연결하는 관광벨트의 중심축으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고 하니 기대해 볼 만 하다.

< 저작권자 © 수산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수산인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인기기사
1
농수축협 채용 실태 집중 조사
2
농신보, 새 어선 건조 시 지원 확대
3
임준택 수협회장 “실물 경험 토대로 수협 당면 과제 해결“
4
문성혁 해수부 장관,‘수산분야 전문가 간담회’ 개최
5
20대의 지지율과 조합 채용 실태조사
6
“직원들은 누구나 똑같은 조직의 주인”
7
과도한 과징금 부정적 반응
8
aT, 강원도 산불피해 구호성금 1,000만원 전달
9
러시아 수역 어획쿼터 42470톤 확보
10
산호어업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가?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서초구 서초동 1589-5 센츄리1차오피스텔 307호  |  대표전화 : 02-588-3091  |  팩스 : 02)588-3094  |  청소년보호책임자 : 한송이
Copyright © 2011 수산인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isusan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