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 전 강경포구는 함경도 원산항과 함께 조선의 2대 포구(浦口)로 영화를 누렸던 곳이었고, 강경장(江景場, 갱갱이장)은 평양 대구와 더불어 전국 3대 시장으로 번성했다. 밀물과 함께 만선기를 휘날리며 몰려들던 어선들과 거룻배들은 온데간데없고 한적한 포구가 되어 그 화려했던 강경포구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침묵으로 말해주고 있다. 강경은 내륙평야 곡창지대를 끼고 금강을 따라 서해로 진출할 수 있는 물류 운송의 교통요지였다. 천혜의 조건을 갖춘 강경은 일찍부터 수운이 발달하여 서해에서 들어오는 각종 해산물과 교역물이 들어와 전국 각지로 배분되는 기능을 수행했다. 제주에서 미역, 고구마, 좁쌀을 실은 배들이 드나들었고, 중국의 무역선들도 비단, 소금 등을 싣고 교역하던 국제 무역항 구실도 했다. 특히 금강 내륙수로는 백제시대에는 일본과의 교통로였고, 고려조에서는 수납된 세곡(稅穀)을 운반하는데 이용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여산창, 군산창, 성당창의 세미(稅米)를 장안으로 운반하는데 이용되었다. 1870년 강경의 옥녀봉(玉女峰)동쪽 기슭에 들어선 상(上)시장은 곡물 등의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고, 강경천 주변의 하(下)시장은 수산물 중심의 상권이 형성되어 상.하 시장의  농수산물 거래규모는 당시 호남지방에서 가장 컸다. 1871년 신미양요 이후 서해안과 중국에서 생산된 소금이 물밀 듯 들어와 이곳에서 전국으로 공급됐고, 미처 운송하지 못한 소금은 시내 곳곳의 창고에 보관되었으며 창고에 들어가지 못한 소금으로 야적되어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1900년대 들어 일본인들이 강경포구로 대거 진출하였고, 그들은 시장에 각종 상점과 금융건물들을 세웠다. 1920년대에 충남도에 전기가 들어왔고, 호남지역 최초로 극장이 세워진 곳도 강경이었다. 당시 정착인구는 약 3만 명에 유동인구가 10만 명이었다니 그 규모를 알만하고 1925년에 최초로 강경노동조합도 탄생되었다.

1870년 부산항, 1874년 원산항 그리고 1877년 인천항의 순으로 주요 항구가 개방되었으나 강경포구는 이보다 앞서 국제무역항으로써 개방항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일제초기부터 반세기동안 성어기 선착장에는 100여척의 어선들이 정박하여 각종 수산물이 집산되자 충남을 비롯하여 전북, 경기의 이름 있는 지방 상인들이 하루에 2-3만 명씩 몰려와 수산물 거래에 뛰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래되고 남은 잉여 수산물이 생기자 이를 오래 보관하기 위하여 풍부한 소금을 이용한 염장법과 수산물 처리가공법도 발달하여 새우젓을 비롯하여 각종 염신품을 공급하는 200년 역사의 국내 최대 젓갈시장으로 변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1년 강경시장의 개시 일에는 점포수가 평균 900개, 출시인원은 평균 7,000명이었으며 가장 성황을 이룬 추석과 설에는 15,000명 이상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1840년부터 1940년의 약 한 세기동안 수산물 판매권을 좌지우지한 것은 강경의 객주(客主)들이었다. 한사람이 10여척의 어선을 운영하는 객주들이 20여 명이나 있었고, 수 십 명의 도매상인들과 등짐꾼들 그리고 우마차를 동원하여 하물을 처리하고 뱃사람들 까지 부리니 수산물 시장은 객주중심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1924년부터 일본상인들의 어업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1935년 ‘어업보호취체규칙’(漁業保護取締規則)‘이 만들어져 객주들을 정면으로 탄압했다. 이 규칙의 골자는 어획물을 한 곳에서만 판매토록 하고 어획물의 해상전재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했으며 강경과 논산에서만 적용됐다. 또한 일인들은 어업조합을 만들어 전국의 객주들에 대항하는 기존 체계를 바꾸려고 하였다. 그 후 1970년대 초까지 10여명의 객주가 명맥을 유지했으나 급속도로 사양길에 들어 1978년을 마지막으로 강경의 객주업은 막을 내렸다.

1905년 경부선 개통과 1911년 호남선의 부설은 금강 수운의 쇠퇴와 강경의 침체를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2년 강경-이리(익산)-군산 간도로의 개통과 1914년 이리(익산)-목포 간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금강 수운은 호남선과의 경합관계에 놓여 도로와 철도에 그 기능을 내어주고 점점 수운은 쇠퇴하고 말았다. 1920년대 들어 수운과 상품배송 및 강경장은 쇠락해 갔지만 포구는 일본의 농수산물 수탈 전진기지로 계속 이용되었다. 충청도와 내륙지방의 쌀과 면화는 뱃길과 철길을 이용해서 빠르게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현재 인구수 1만 여명을 상회하는 쇠락한 읍내를 에워싼 제방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금강이 있어 그나마 이곳에 포구가 있었음을 말해줄 뿐이다. 600년 가까이 충청과 호남의 고역중심지였던 강경의 전설은 ’세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강경과 강경포구가 기록된 것을 볼 때 당시에도 이름난 교역중심지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강경 한 마을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바다와 육지 사이에 위치하여 금강 남쪽의 들판 가운데 하나의 큰 도회가 되었다라고 강경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건설된 금강하굿둑은 황해와 금강사이의 수운을 완전히 막아버리면서 1978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서해에서 강경으로 새우를 실은 배가 다니지 못하게 됐다. 그럼에도 2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전국 젓갈수요의 60%를 점하는 젓갈시장은 1990년대부터 논산시의 옛 시장의 번영을 찾자는 복원사업과 함께 새우젓, 아가미젓, 꼴뚜기젓, 명란젓, 낙지젓, 토하젓 등 곰삭은 젓갈의 풍미를 알리는 140여 곳의 상점이 지금도 성업 중이다. 강경의 식당에서 젓갈 정식을 주문하면 15-20가지의 색다른 젓갈을 체험할 수 있다. 옥녀봉에 오르면 1860년 우리나라 최초의 조석표인 암각문 해조문(解潮文, Inscription of Tide table)이 빛이 바래 희미하다. 20세기 초까지 형용색색의 기를 꼽고 들락거리던 어선들과 무수한 인파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바다를 품은 비릿한 젓갈 냄새가 강경포구 전성기의 영욕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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