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선물이자 인류 최초의 보석이라 일컫는 진주에 관한 오래된 기록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주(周)나라 때 작자 미상이지만 유교경전의 하나인 이아(爾雅 BC 약 1000년)라는 책에 기록이 있다. 또 서경(書經)의 우공편(禹貢篇)에도 우왕(禹王 BC 2200년)에게 진주를 공물(貢物)로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이 외에도 중국에서는 BC 2500년경에 상당량의 진주가 상거래 되었다는 흔적도 남아 있다. 인도에서도 브라만의 서적(BC 500년)속에 기록이 있고, 인도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산지라고 했다. 그리고 인도의 경전들과 설화들에는 진주를 발견한 것이 힌두의 신 ‘크리쉬나(Krishna)’라는 내용도 있다. 이집트에서도 BC 3210년경에 이미 진주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유럽에서는 BC 350년경에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과 관련하여 진주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로마제국의 줄리어스 시저가 섬나라인 영국을 침공한 것도 그곳에 진주가 산출된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얻으려고 원정하였다는 이야기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그녀의 연인인 안토니 앞에서 진주로 만든 귀걸이를 분쇄하여 식초에 타서 먹였다는 이야기가 그 진위는 고사하고 전해지고 있다. 로마제국 최전성기에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로마의 장군 비텔리우스(Vitellius)는 자기 어머니의 진주귀고리들을 팔아서 전투자금을 조달했다고 한다. 미국 최초의 보석학자라고 부르는 조지 프레드릭 쿤즈(George Frederick Kunz)는 1908년 그의 작 진주에 대한 책(The book of Pearl)에서 인도의 해안에 살던 부족이 식량으로 패류를 먹는 과정에서 진주를 발견하고 보석으로서의 광택과 희소성을 처음 알았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기원전 14세기 한 공주가 소유했던 진주목걸이는 쿤즈의 평가에 힘입어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는 조선시대 화관, 족두리, 앞댕기에서 여러 개의 진주를 실로 꿰어 늘어뜨린 장신구나 장식품이 유물로 남아 있고, 뒤꽃이, 떨잠, 비녀, 머리꽃이 등에는 옥이나 산호 등 다른 보석류와 함께 어울리게 부분적으로 장식한 유물도 남아 있다.
진주는 해수 또는 민물에 사는 이매패(二枚貝)인 진주조개(Pinctada Fucata)에 인공핵을 삽입하여 만들어지고, 일부는 전복, 고동조개, 달팽이 속에서도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진주는 탄산칼슘이 주성분으로 조개 속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이것을 탄산칼슘이 둘러싸고, 이 탄산칼슘의 입자는 ‘콘키올린(Conchiolin)’이라는 물질의 층을 만드는데 이것이 겹쳐져서 진주층(nacre)이 형성된다. 진주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 첫 번째는 크기(size)로 클수록 가치가 있다. 둘째는 광택(luster)으로 진주층이 두꺼울수록 거울처럼 사물이 또렷하게 반사되어 보일수록 가치가 높다. 셋째는 색(color)으로 진주층의 굴절로 인해 발생하는 무지개 색을 띈 것이 고가이고 검은 회색을 띄는 흑진주(black pearl)는 최상품이다. 넷째로 진주의 표면(surface)으로 흠집이 없으며 매끄럽고 일정한 색상과 광택을 유지해야 한다. 다섯째는 진주의 형태(shape)로 완벽한 구형(球形)을 유지해야 한다. 지구상에는 10만3000여종의 패류가 서식하고 있고, 진주 형태가 생기는 패류는 1만5000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중 보석으로서의 진주가 생기는 패류는 약 1천300종이며 주로 온대, (아)열대의 바다에 서식한다. 현재는 진주수집가, 특정종교 관계자, 소수의 구라파인, 일부 아랍인들만이 자연산 진주를 고집하고 있을 뿐 양식진주가 전 세계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1916년 세계 최초로 일본의 고끼치 미키모토(1858-1954)가 토바(鳥羽)만에 있는 작은 섬 ‘미키모토 진주섬’을 중심으로 양식진주에 성공한 이후 약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가 양식한 아코야 진주(Akoya Pearl)로 전 세계시장의 80% 이상을 점하고 있는 반면 흑진주 역사는 30년에 불과하나 불령 폴리네시아의 타이티 흑진주가 전 세계시장의 90%를 점하고 있다. 필자는 ‘타이티 진주시장(Tahiti Pearl Market)’을 방문한 바 있다. 진주시장은 중국계 타이티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진열장 안에는 크기가 다르고 색상도 여러 종류인 흑진주가 빛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눈길을 끄는 것은 가격표에 노 프라이스(no price)라고 적힌 것들이다. 상점 주인에게 물어보니 결정된 가격은 없고 구매자와의 흥정으로 가격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자세히 물으니 영국왕실이 구매한 것과 꼭 같은 크기와 색상이란다. 이것들은 흑나비진주패(Pinctada Magaritifera)라는 태평양 연안에 분포하는 조개에서 양식된다고 한다. 타이티 섬을 비롯하여 보라보라 섬, 타하마 섬, 랑기로아 섬 등 7개의 섬에 양식단지가 있다. 타이티는 현대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네델란드 화가 반 고흐가 자살하기 전에 거주한 아름다운 곳이고 그의 미술관도 있다. 우리의 양식진주 역사는 1961년 당시의 수산진흥원(현 수산과학원)이 최초로 시도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1990년에 들어서야 ‘해덕진주’가 순 우리기술로 양식, 가공기술을 확립한 일천한 역사를 갖고 있고, 현재 10여 곳에 해수, 담수 진주양식장이 있다. 지난 12월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이 북태평양의 해양과학기지인 마이크로네시아에서 지름 8∼13mm 크기의 다양한 천연색 진주 700여개를 생산하여 수확률이 타이티와 비슷한 36%를 기록하였다고 하니 쾌거라고 하겠다. 특히 종패로부터 수확단계까지 완전양식에 성공하였다고 하니 놀랍고, 연간 100억 원의 수입대체효과를 걷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조만간 우리 흑진주가 국제시장에서 ‘노 프라이스’로 거래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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