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하순 베이징을 3번째로 방문했다. 앞서 두 번은 ‘90년대 초이니 20여년이 흐른 후의 베이징을 보고 싶었다. 그 많던 자전거는 다 어디로 갔을까. 베이징의 도로는 거대한 자동차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고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건축 1001개(마크 어빙 외 공저 2009)에 포함된 이화원(이허위엔 頤和園)이 베이징 서북쪽 약 16km에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12세기 금·원대부터 황실의 휴식 별장으로 사용되어오다가 청나라 건륭황제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증축되었다. 이후 1885년 서태후(西太后 본명 葉赫那拉蘭兒) 자희(慈喜)는 독일에 전함을 주문하려고 했던 해군력 증강 예산을 10년간 청의원(淸漪園 칭이위엔)의 확장 보수에 전용하고 그 이름을 이화원으로 개칭했고, 서양연합군과의 전투에서 불타고 허물어진 것을 본격적으로 리모델링했다. 불도저나 포클레인이 없던 시절 순전히 백성들의 삽질만으로 곤명호(昆明湖 쿤밍호)를 비롯하여 4곳의 인공호를 만들고, 파낸 흙으로 만수산(萬壽山 완셔우산)을 만들었다니 또 하나의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 할만하다. 290헥타르(약90만평)에 3000여 칸이 넘는 전각과 누각,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최고의 상징인 8각형의 3층 건물인 불향각과 273칸의 복도식 통로로 700명의 화공을 동원하여 1만4천여 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728m 길이의 장랑(長廊)은 기네스북에도 올라있다. 이 장랑은 서태후가 비오는 날 곤명호의 물고기가 유영하는 모습을 보기 위하여 거니는 장소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서태후의 처소인 낙수당(樂壽堂)의 침실 거울에는 256가지의 다른 글씨체로 한 단어를 써놓았는데 ‘장수(長壽)’라고 한다. 이런 이화원은 서태후의 은거 공간이면서 정치활동 공간으로 74세에 이질(痢疾)에 걸려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 浮儀) 즉위 다음날 급사할 때까지 48년간 수렴청정을 한 곳이었고, 셀 수 없는 반대자를 학살한 곳이기도 했다. 서태후는 죽을 때 유언으로 ‘앞으로는 절대 여자가 정사를 농락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니 그 폐단을 반성했는지 모르겠다. 서태후의 이화원 확장으로 국고가 바닥이 나서 청·일 전쟁에서 패했고, 청나라가 기울기 시작한 도화선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가들이 있는 반면 서태후 때문에 청나라가 반세기 더 유지되었다는 일부 사학자도 있어 지금도 그녀의 공과를 평가 중이라고 한다.

서태후는 가문이 좋거나 왕족 출신이 아니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지방 하급관리의 딸로 후궁선발대회에서 뽑혀 궁녀로 들어왔다고 한다. 황제를 중심으로 동쪽에 처소가 있어 동태후(東太后)라고 불린 황후는 후사가 없고, 서쪽에 처소가 있어 서태후로 불린 귀비는 태자를 생산했다. 함풍제(咸豐帝)가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인 천진조약을 파기하자, 제2차 아편전쟁으로 서양연합군이 베이징에 진격해옴에 따라 열하(熱河)로 피신했으나, 주색잡기에 몰두한 결과 31세의 젊은 나이로 서태후가 낳은 6세의 태자를 남긴 채 열하(熱河)의 피서산장에서 죽었다. 이 후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과 동태후 그리고 서태후간의 3두 체제에 의한 권력분점이 20년간 유지되었다. 그러나 13년간 재위에 있었던 서태후 아들인 동치제(同治帝)가 18세에 천연두로 급사하자 서태후는 친정언니의 아들인 세 살의 조카를 황제(光緖帝)로 옹립하였다. 서태후의 독살설이 제기된 가운데 동태후는 급사하고, 20년 이상 외교 분야 책임자였던 공친왕마저 실정의 책임을 물어 제거했다. 서태후의 일인 독주체제가 완성되었다. 서태후는 여태후(呂太后 呂雉), 측천무후(則天武后)와 더불어 중국의 3대 악녀로 불린다. 측천무후나 서태후는 사악한 찬탈자라는 면에서는 같으나 측천이 훌륭한 통치자인 반면 서태후는 탐욕스런 통치자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서태후는 머리를 빗다가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빠지면 담당 궁녀나 내시는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젊음을 유지한다고 매일 유모의 젖을 빠는가 하면, 진주가루로 맛사지를 하여 60세에도 얼굴 피부가 어린애 같았고, 70세까지 건장한 청년을 밤마다 불러들여 즐긴 후 소문을 막기 위하여 전부 죽였다고 한다. 3000벌이나 되는 의상을 하루에도 여러 번 갈아입었고, 그녀의 식단에는 128종의 산해진미와 30종의 반찬 그리고 60종의 주식이 한 끼 식사로 올라왔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은 60량에 해당하는 가격으로 1만 명의 농민이 하루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태후의 처소인 낙수당 인근에 아첨꾼인 이인영의 거처인 영수제가 있다. 이인영은 서태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길들인 새를 풀어놓고 다시 돌아오게 하여 미물인 새마저 서태후를 떠나지 않고 돌아온다고 아부하였다. 그러나 서태후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이번에는 서태후가 자신의 장수를 위하여 거북이와 물고기 방생을 즐기는 것을 보고 부하를 시켜 물고기를 며칠 굶긴 후 방류하고 서태후가 자주 둘러보는 장소에 떡밥을 몰래 묻어놓아 물고기가 다시 돌아오도록 하여 아첨의 극치를 보였다고 전한다. 곤명호에는 지어교(知魚橋 Zhiyu Qiao)라는 다리가 있다. 이 다리에 오르면 수많고 다양한 물고기가 몰려든다. 서태후가 방생한 물고기의 몇 대 손이나 될까? 당시 해군 군비증강 비용을 탕진한 서태후지만 현재 이화원을 찾는 관광객 수가 연 수백 만 명을 헤아려 탕진한 금액과 비교할 수 없는 돈을 거두어들이고 있다고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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