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600년 경 중국 춘추시대 각 제후국들의 흥망성쇠는 정사와 야사가 혼재되어 있고 너무 복잡하여 명쾌한 설명이 쉽지 않으나 우리에게 친근한 고사성어도 많이 남겼다. 오(吳)나라는 주(周)나라 시조의 삼 형제 중 큰아들이 셋째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양자강 하류에 새로이 세운 나라로 19대 수몽(壽夢)은 넷째 아들 계찰(季札)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으나, 국가의 기강이 문란하여진다고 반대하여 장자인 제번(諸樊)이 왕위를 이어받고 차례로 왕위를 세습키로 했다. 그러나 넷째 게찰은 차례가 오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기에 할 수 없이 셋째 왕이었던 여매(餘昧)의 아들 요(僚)가 큰 아버지이며 장자인 제번의 아들로 사촌 형인 공자 광(光)이 있음에도 선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왕위에 올랐다.

한편 초(楚)나라 평(平)왕 정권에서 대신(大臣)이며 태자 건(建)의 스승이던 오사(伍奢)는 간신배(비무극)의 모략으로 국경 수비대 장군인 큰아들 오상(伍尙)과 함께 집안이 화를 당한다. 이때 평왕의 근위대장으로 있던 둘째 아들 오자서(伍子胥)는 사전에 정보를 알고 인근 제(齊)나라로 탈출하여 후일 손자병법을 남긴 손무(孫武)에게 잠시 의탁하고 있었으나, 초나라로부터 오자서는 대역죄를 범한 죄인으로 그의 인도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초나라의 외교력이나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평(平)왕의 요구를 거절할 힘이 없는 제나라는 이 문제로 논쟁이 시작되자 손무는 아버지(손빙)로부터 오자서의 초나라 인도가 불가항력이라는 것과 더불어 손무 가문의 정적(무, 고씨)들의 견제로 인하여 오자서를 보호할 수 없게 되자, 정적 가문 사병(私兵)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오나라로 탈출에 성공시켜 사지에서 그를 구하였고, 사촌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절치부심 왕위를 노리든 공자 겸장군인 광(光)에게 의탁하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얼마 후 손무 자신도 정적 가문의 복수를 피하여 제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경시라는 호위무사 하나만을 데리고 오나라로 간 후 산속에 은거하여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죽간(竹竿)에다 쓰게 된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오자서는 공자 광에게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서 손무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오자서와 손무 두 참모를 얻게 된 광(光)은 은밀히 사촌동생인 요(僚)를 시해(弑害)할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게 된다. 계획의 첫 단계는 그의 허점을 찾는 것으로 멸문지화를 당하여 복수의 화신이 된 오자서가 광보다 더 열심이었다. 오자서는 오나라에서 성공하여 자기 조국인 초나라를 패망시켜 아버지와 형 등을 죽인 초평왕에게 복수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었기 때문에 오나라에서 성공이 손무보다도 더욱 절실했다. 당시 오왕요는 자기의 왕위가 늘 불안하다고 생각했기에 주야로 호위를 물샐 틈 없이 하였다, 그래서 항시 쇠사슬 갑옷을 3중으로 입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기에게 가까이 올 때에는 무릎으로 걷고, 허리를 구부린 후 고개를 들지 말고 보고나 물건을 바치도록 엄중히 경계하였고, 몸수색과 소지품 검사를 철저히 하였다. 또한 취침 중에도 다르지 않았다. 오자서는 손무와 요왕을 면밀히 살핀 바 그의 약점은 식탐(食貪) 하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나 음식이나 마시는 차 등에 독을 넣는 고전적인 방법으로는 그를 제거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신이 아닌 이상 인간에게는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는 생선을 너무 너무 좋아했다. 그것도 구운 생선이 으뜸이었다. 당시 오월동주(吳越同舟)인 춘추오월은 제철기술이 대단했다. 그러나 구운 생선 속에 비수를 만들어 넣을 수는 없었고, 생선가시와 닮은 모양의 예리한 칼을 생선의 뱃속에 넣기로 하고 오나라에서 생선 굽기의 달인인 전제(專諸)와 철을 다루는 장인을 발굴하여 생선가시 모양의 어장(漁腸)이라는 명검을 완성시키고, 전제에게는 자객훈련 까지 철저히 시켰다. 모든 계획이 완성되자 공자 광은 사촌동생인 요왕을 자기 궁으로 만찬에 초대하면서 초대장에 이르기를 양자강에서 몇 백 년에 한번 나온다는 생선 중의 생선이 잡혀, 오나라 최고의 달인으로 구이를 시켜 진상코자 한다고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요는 사촌형과의 관계도 개선하고 그의 의중도 탐문할 생각으로 기꺼이 초청에 응했다. 전제는 정성을 다하여 생선을 구운 후 뱃속에 예리한 생선가시 칼이 들어있는 귀한 생선을 쟁반에 담아 근위병들의 몸수색과 무릎으로 기어서 요왕 앞까지 가는데 성공했다.

머리는 숙인 채 생선 쟁반을 내밀자 형용키 어려운 진귀한 냄새에 요왕은 크게 기뻐하여 현기증이 날 정도로 무아지경이 되었고, 폭풍 흡입 찰라 자객 훈련을 받은 전제는 순식간에 어장을 꺼내어 이상화 선수 같이 빠른 속도로 삼중 철갑옷이 미치지 않는 무방비의 요의 목을 깊숙이 찔렀다. 생선가시로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공자 광이 21대 오왕 합려(闔閭)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합려는 날이 갈수록 오만해지고 기원전 515년 손무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를 군사에서 해임한 후 오자서와 태자만 대동하고 월나라를 침공했다가 월나라 장군이 쏜 화살을 맞고 비명횡사하였다. 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태자 부차(夫差)는 부친의 복수를 위하여 가시가 돛인 섶나무(臥薪)위에서 잠을 자며 손무를 재 등용하고 2년간 힘을 길러 월왕 구천(句踐)을 자기 말고삐 노예로 삼았으나 점차 오만해 짐에 따라 손무는 죽음을 가장하여 아들을 데리고 탈출하고, 오자서는 자결케 하였다. 반면 구천은 중국 4대 미녀중 하나인 월의 서시(西施)까지 바치고 장기간 모욕을 당한 후 풀려난 2년간 쓸개(嘗膽)를 빨면서 힘을 길러 오왕 부차를 목메 자결케 하였다.(臥薪嘗膽). 인생사 ‘일모도원(日暮途遠)’이 아닌가.

저작권자 © 수산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