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피난민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국제시장은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했고, 너도 나도 집에서 들고 나온 물건을 팔아 호구지책을 이어갔다. 그 중에서도 시장 앞 길거리에서 북을 메고 ‘동동구리무’를 사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으니 오늘날 화장품으로 백만장자가 된 태평양화학 창업자이다. 황해도 평산이 고향인 서성환 회장은 개성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천년을 이어온 개성상인의 후예로 자린고비 경영으로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미국의 월마트(Wall Mart) 상속자는 픽업트럭을 타고 다니고, 영국의 휴대전화 판매회사 사장은 이발료가 아까워 집에서 머리를 깎고, 스웨덴의 이케아 가구 창업자는 배기량 2400cc 볼보를 15년 째 몰고 다니고, 우리가 잘 아는 ‘워런 버핏’은 50년 전 3만 1500불에 구입한 낡은 집에서 산다. 이들의 공통점은 억만장자이고, 또 다른 공통점은 왕 짠돌이 자린고비 경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나 각종 구호단체, 환경단체, 질병연구 등에 거액을 아끼지 않고 기부한다는 큰 손들이다. 여기에 빌 케이츠나 오프라 윈프리 등은 리더들이다.

충북 단양군 단양읍에 제비봉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제비봉 아래 장회리 마을에 자린고비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영조때의 이름난 구두쇠였던 조륵(1649-1714)의 별명이다. 조륵은 참봉 조유증(趙惟曾)의 넷째 아들로 단순한 구두쇠가 아니라 근검절약으로 만석군의 큰 재산을 모았다가 자선하는데 재산을 모두 사용했고, 조정의 벼슬(加資) 제의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그의 착한 행적을 기리고자 ‘자인비(慈仁碑)’를 세웠고, 이 비석을 자인의 옛 비석 이라는 뜻인 ‘자인고비(慈仁古碑)라 부르게 된 것이 ’자린고비‘가 됐다고 한다. 옛날 자린고비가 끼니때마다 전혀 반찬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린고비네 집에 굴비 한 마리를 놓고 갔다. 자린고비는 대경실색하여 굴비를 집어 들더니 “밥도둑이 어디서 기어 들어왔어?” 하고 집밖으로 집어 던져버렸다. 한번은 장모가 자린고비 집에 왔다가 고구마 몇 개를 가져가자 곧바로 쫒아가 고구마를 찾아왔고, 어느 날 장독뚜껑을 열고 햇볕을 쬐고 있을 때 파리 한마리가 장에 앉아 장을 빨아먹고 날라 가버리자 자린고비는 파리다리에 묻어간 장이 아까워 파리를 충주까지 쫒아갔다가 남한강을 건너느라고 놓쳐 버리자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한다. 한번은 전라도 구두쇠가 조륵을 찾아와 돈 버는 법을 전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조륵은 쾌히 승낙하고 음성에서 1백리가 넘는 충주까지 그와 동행하는데, 전라도 구두쇠는 집신을 한 짝만 신고 걷다가 교대로 다른 쪽 집신을 신고 걸었다. 이에 반해 조륵은 1백리 길을 아예 신발을 들고 걸었다고 한다.

자린고비는 자린곱이, 자린꼽쟁이, 꼬꼽쟁이, 꼽재기, 자리꼽재기로도 불린다. 어느 구두쇠가 부모 제사 때 쓸 제문의 종이를 아껴 태우지 않고 접어 두었다가 두고두고 써서 ‘저린고비’가 생겨났다는 설화도 있다. 또 하나는 구두쇠 영감이 자반 생선(굴비) 한 마리를 사서 천장에 매달아 놓고 식구들에게 밥 한 숟가락 떠먹고는 자반을 한 번씩 쳐다보게 했는데 아들이 어쩌다가 자반을 두 번 쳐다보니 구두쇠 영감이 ‘얼마나 물을 켜려고 그러느냐’하고 아들을 야단쳤다는 일화도 전한다. 또 자린고비의 며느리 역시 구두쇠로 생선장수가 오자 짐짓 사는 시늉을 하면서 한참 주물럭거리다가 고기는 사지 않은 채 생선장수를 돌려보내고 생선을 주물럭거렸던 손을 씻어 그 물로 국을 끓였더니, 자린고비 시아버지 왈.. 며느리더러 그 손을 물독에 넣어 씻었더라면 두고두고 고깃국을 먹을 것을 아깝다고 나무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대표적인 예화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의 이야기를 보면 청주의 구두쇠와 충주의 구두쇠가 만나 전자가 후자에게 문종이를 주었다가 돌려받았는데 후자는 그 창호지에 묻은 자기네 밥풀을 돌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대표적으로, 그만큼 아꼈다는 것과 부자인데도 열심히 일을 했다고, 경영철학으로 까지 발전시키고 있다. 토마스 제퍼슨은 ‘돈이 없으면 쓰지 말라’고 했고,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유산을 더 오래 기억한다’라고 말하여 ‘재산은 화의 문이요 유산은 몸을 베는 칼’이라고 유산의 상속을 경계했다. 또한 간디는 ‘일하지 않고 얻는 부’를 7대 대죄(大罪) 중의 하나로 단정했다.

1963년 김수용 감독은 전설적인 배우 김승호와 황정순을 주연으로 ‘굴비’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다. 농촌에 살던 노부부(김.황)가 성공한 아들과 딸을 찾아 서울로 갔다. 그러나 그들은 큰 아들집 안마당에 널어놓은 굴비 한 마리를 먹었다고 해서 며느리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고, 큰 사위를 회사로 찾아간 이들 노부부를 큰 사위는 직원들에게 시골에 사는 묘지기라고 소개한다. 여관을 경영하는 딸은 엄마와 아빠를 여관 보일러실에 재운다. 이렇게 괄시를 받고 돌아가는 길에 남편을 잃고 손주와 둘이서 삯바느질을 하며 살아가는 작은 며느리의 달동네 집에 들렀다. 그리고 작은 며느리의 대접을 받으며 웃음을 되찾고, 돌아가는 완행열차에서 소주한잔을 걸치며 아들 며느리의 자랑을 여객 손님들에게 늘어놓는다는 줄거리이다.

굴비는 고려 17대 임금인 인종은 1126년 5월 난을 일으킨 이자겸을 영광 법성포로 귀양 보냈다. 그는 해풍에 말린 조기를 먹어보고, 그 맛이 좋아, 임금에게 진상하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屈) 않겠다(非)’ 즉 ‘비굴하지 않겠다’ 는 뜻으로 조기에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노량진 시장의 젓갈할머니, 함양의 염소할머니는 자린고비 경영학을 실천한 분들이다. 작은 돈을 쓰지 않으면 큰돈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경영학 초보임을 잊지 말자.(小財不出 大財不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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