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국시대 정치가이자 대시인으로 만인의 추앙을 받으며, 초(楚)나라 회왕을 도와 눈부신 정치활동을 하다가 간신들의 참소로 호남성의 상수(湘水)로 추방당한 굴원(屈原 B.C 340- B.C 278년)이란 사람이 있었다. 굴원은 스스로 ‘나는 맑은 물에서 나는 향초인 강리(江籬)와 숲속에서 나는 향초인 백지(白芷)를 몸에 걸치고, 연보라색 향초인 추란(秋蘭)을 실로 꿰어 노리개로 찬 듯 청렴결백했다’라고 적고 있다.(離騷). 이 사람은 유배지에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임금이 계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울분을 참지 못해 멱라수(汨羅水)라는 강물에 빠져죽었다. 그는 어부사(漁父辭)라는 시를 남겼는데, 세상의 더러움과 결코 타협하지 않은 그의 강직한 성품과 세상과 담을 쌓고, 유유자적하며 어촌에서 살아가는 은자(隱者)인 어부(漁夫)의 문답체의 대담이 돋보인다.

굴원이 이미 쫓겨나 강가와 물가에 노닐고(屈原旣放 游於江潭)/ ..어부가 보고 묻기를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니시오(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與)/ (중략) 어부가 말하기를 성인은 세상 사물에 얽매이지 아니하고(漁父曰 聖人 不凝滯於物)/ 세상을 따라 변하여 갈 수 있어야 하오(而能 與世推移)/..차라리 상수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어찌 결백한 몸으로서 세속의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소(安能以皓皓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어부가 빙그레 웃으며 노를 두드리고 떠나가면서,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갓 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고 청탁(淸濁)에 초연한 어부는 창랑가(굴원의 어부사)를 부르면서 떠나간다.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조작가였던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당시에 유행하던 민요 어부가(漁父歌)를 개작하여 어부사(漁父詞)를 지었는데 그 내용이 농암집(聾巖集)에 수록되어 있다. 1549년 이현보는 38세 때 안동에 유배되었고, 중종반정으로 복직되었으나, 말년에 칭병을 이유로 은퇴하여 고향 예안에 은거하던 중 손자들을 통하여 잡가형태로 불려 지던 민요 어부가를 접하고, 자연을 벗하며 고기잡이를 하는 한가한 삶에서 당시 청빈한 양반 계급의 풍류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고, 가사가 한적하고 담긴 뜻이 심원하므로 분강(汾江)에 배를 띄우고, 아이들을 시켜 시를 노래하게 하였다. 그러나 말이 순서적이지 못하고 혹은 중첩 되었으므로 첨삭하여 이를 개작하였다고 한다.

한문학이 흥성하던 시대에 국한문 혼용의 노래를 정리한 문학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이황(李滉 1501-1570)의 도산십이곡과 함께 안동 지역 선비들의 강호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굽어보면 천심녹수(千尋綠水)돌아보니 만첩청산(萬疊靑山)/ 십장홍록(十丈홍鹿-속세)이 얼마나 가렸는고/ 강호(이상향)에 월백하거든 더욱 무심하여라, 라고 하여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산림을 헤매고 산을 오르며, 강에서 낚시하는 자연친화적 삶 즉 강호에 묻혀 사는 어부의 한가로운 생활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장안(長安)을 돌아보니 북궐(北闕)이 천리로다/ 어주(漁舟)에 누어신달 니즌스치(잊은적이) 이시라. 라고 하여 강호(어부)와 북궐(임금)을 대비시켜 몸은 비록 강호에 있지만 항상 나라와 임금님을 생각한다고 밝히고 있어 현실도피의 비난을 잠재우고 있다고 하겠다.

또 효종 때인 1651년 고산 윤선도(尹善道)는 65세 되던 해에 어부가로 ‘이어라 이어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닫드러라 닫드러라’ 등의 흥을 돋우는 조흥구(助興句)가 들어있는 이 노래를 역시 이를 개작하여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를 어부가에서 시상(詩想)을 얻어 춘, 하, 추, 동 각각 10수씩을 우리말로 지었으며 ‘오우가(五友歌)’와 함께 그의 대표작이다. 보길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든 윤선도는 보길도의 사계(四季)를 경험하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노래했다. 춘사(春詞)의 대표어구를 보면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어촌의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 말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로 원경의 마을 경치와 근경의 물고기 등으로 생동감 있게 처리하고 있다. 하사(夏詞)로는 닻 올려라 닻 올려라/ 삿갓은 이미 쓰고 있노라 도롱이는 가져왔느냐/ 지국총.., 추사(秋詞)로는 배를 띄워라 배를 띄워라/ 늙은 고기잡이라고 비웃지 마라. 그림마다 어옹(漁翁)이 그려져 있더라/ 지국총.., 동사(冬詞)로는 노저어라 노저어라/ 앞에는 넓고 맑은 바다. 뒤에는 겹겹이 둘러 있는 흰산/ 지국총..,로 노래하여 각 계절마다 유유자적한 삶, 몰아일체의 삶, 탈속적인 삶 그리고 이상향과 같은 자연속의 삶을 노래했다.

이현보가 살았던 16세기는 정치적으로 당쟁이 있었던 혼탁한 시대여서, 강호에 있으면서도 정치현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안주할 수 없었기에 자연에 대한 경이를 일부 억제할 수밖에 없었으나, 윤선도가 살았던 16세기말-17세기 초의 강호시가는 정치적 혼탁으로부터 떠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흥취의 공간을 노래하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굴원의 어부사(漁父辭)나 이현보의 어부사(漁父詞) 그리고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 나오는 어부(漁父)는 생계를 어업으로 하는 어부(漁夫)가 아니라, 모든 자연을 관조하고 그것을 완성하며 즐기는 관찰자 시점 혹은 유람자 관점으로 어부생활을 읊은 것이다.

강원도 영월에 ‘어라연(漁羅淵)’이란 곳이 있는데 어라(漁羅)는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뜻하고, 고기는 중생이라고 한다(숨어사는 즐거움). 성경에도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한 말씀이 있다.(마 4:) 따라서 예로부터 어부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표상이었다. 최근 봇물같이 터저나오는 권력자들의 탐욕을 보면서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라고 노래했던, 옛날 선비들의 안빈낙도(安貧樂道)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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