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어느 날 전남 목포의 한 중학교에서 원어민 영어교사로 있는 벤 포니(Ben Forney)씨가 서울 영등포에 소재한 한 교회를 찾았다. 그를 맞이한 사람들은 팔순을 넘긴 노신사들로,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중에 흥남부두에서 벤 포니의 할아버지인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y) 대령의 도움으로 20-30대의 젊은 나이에 미 상선을 타고 남한으로 무사히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에드워드 포니 씨에게 감사할 수 없게 되자, 수소문 끝에 그의 증손자가 한국에서 원어민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초청하여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다. 벤 포니 씨가 본적도 없는 할아버지 사진을 보여주고, 그는 용감하였고 자상한 분으로 10만 여명의 한국인의 가슴속에 지금도 살아 계신다고 재삼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 증손자 포니는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중 발휘한 인류애에 뿌듯하고, 그를 기억하여 자신을 초청하여 준데 대하여 감사하고, 돌아가는 그의 손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사진이 한 아름 쥐어져 있었다.

1952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던 한국군은 순식간에 서울 점령은 물론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미군과 유엔군의 도움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압록강 물이 전달되고, 미 육군 7사단은 백두산 아래 혜산진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과 인해전술 특히,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면서 남하하는 중공군은, 옛날 진나라 말기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싸울 때 초패왕(楚覇王) 항우 진영에 밤만 되면 초나라 노래가 들려 항우 군사들을 무기력하게 만든 사면초가(四面楚歌)를 연상시키는 무모하면서도 소름끼치는 두려움을 주었다고 한다.

아군은 12월4일 평양에서 철수하고, 12월 8일 흥남 철수 역시 12월 15일 미 해병1사단을 시작으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영하 25도의 살을 에는 추위와 강풍, 눈보라 속에서 철수가 이루어졌다. 흥남 철수작전(redeployment 재배치)에서 한. 미 병력 10만 명과 차량 1만7천대, 피난민 10만 명과 35만 톤의 군수품을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시키는데 성공한 세계전사와 기네스북에도 기록된 철수작전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12월 24일 ‘메리디스 빅토리아(Meredith Victory)’호가 철수 마지막 상선이나, 아직 철수하지 못한 피난민 1만 4천 명과 중요한 군수장비 때문에 이들을 태울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이 때 미10군단 고문관이며 통역인 한국인 의사 현봉학 씨와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이 에드워드 포니 대령을 설득하고, 포니 대령은 10군단장인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과 7800톤급 빅토리아 호 선장 레너드 나루(Leonard LaRue)를 설득하여, 이미 선적해 있던 탱크, 장갑차와 군수품을 전부 바다에 처넣고, 당초 승선 예정이던 미 1군은 배를 타지 않고 육로로 중공군을 무찌르면서 남하할 터이니 피난민을 태우라고 했다는 미 해병대의 따뜻한 이야기는 한국 전사(戰史)는 물론 마지막 배에 승선하여 목숨을 구한 당사자나 그의 후손들은 전한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빅토리아호에서는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기도 한 세계 전쟁 역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휴머니즘 드라마였다.

이러한 숨 막히는 철수작전에는 한.미 군함 LST 등과 미 상선은 물론 많은 수의 어선 등 200여척이 동원됐다고 하며, 그 중 어선은 규모가 작은 소형선들이 많았으나 콩나물시루같이 많은 인원을 태우고 동해안 근접 항구에 입항했고, 그 중에는 여러 번 왕래한 어선도 있다고 한다. 그리나 빅토리아 호에 미처 승선하지 못한 사람들은 수십 척의 무동력 어선을 타고 눈보라치는 추위와 높은 파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를 저어 남하했다. 그러나 이 작전에 큰 공을 세웠으면서도 군함과 상선에 가려 어선들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 아쉽다. 지금이라도 사료를 찾아 희생과 공로를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의무는 우리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 어선은 유사시 인적, 물적 자원 소개, 수송 등 군함에 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손색이 없이 현대화 동력화 되어 있음은 막중한 전력임에 틀림이 없다. 당시 미 해병1사단은 인접 장진호에서 자신의 병력 10배에 달하는 12만 명의 중공군을 맞아 남하를 지연시키는 총 공세를 폈으며 황초령을 넘어 자신들도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하여 남쪽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한, 이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사에 영웅적인 작전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경남 거제의 당시 포로수용소의 흥남부두 철수작전 기념비에는 10만 명의 민간인을 구한 6명의 영웅들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들이 있었기에 마지막으로 승선한 1만 4천명은 그해 크리스마스 기적과 자유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흥남부두 철수작전과 비슷한 ‘덩케르크(Dunkerque)’ 철수작전이 있었다. 1940년 5월 25일 영.불 연합군을 추격해온 독일군 전차부대는 덩케르크를 불과 20Km 앞두고, 5월 26일부터 6월4일까지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통해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델란드군 등 연합군 장병 33만 8682명이 목숨을 구했다. 영국 템스강의 어선, 거룻배, 민간 여객선까지 도버해협을 건너 덩케르크로 행했고, 심지어 침몰 직전의 노후 어선들도 달려와 해군당국을 난처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아비규환의 덩케르크 작전 기간 중 총 동원된 861척의 선박 중 13척의 구축함을 포함해 272척이 침몰되고 많은 병사가 희생됐다. 흥남부두 철수작전의 성공과는 비교된다고 하겠다. 1953년 ’현인‘이 부른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굳세어라 금순아’이다. 금순이도 어선을 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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