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 검소한 고택(古宅)이 한 채 있다. 그 집 뜰에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마주 서 있다. 이 집은 고려 말 무신으로 “황금을 돌같이 보라”고 했다는 최영(崔瑩) 장군이 지은 집으로 그의 손자사위(孫壻)인 맹희도(孟希道)가 물려받은 후 맹사성(孟思誠)을 거처 수 백 년 동안 신창(新昌) 맹(孟)씨 후손들이 살아온 유서 깊은 고택이다.

맹사성은 열아홉에 장원급제하고 스무 살에 파주 군수가 된 후 어느 날 인근의 사찰을 찾아가 스님에게 치도(治道)를 여쭈어보았다. 그는 스님에게 제가 이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마음속으로 지켜야 할 좌우명을 물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를 하였으니 그의 속마음은 호기와 자만심이 가득 차 있었다. 스님은 맹사성의 질문에 즉답으로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많이 하라고 당부했다. 맹사성은 그와 같은 일은 어린아이도 다 아는 일이거늘 먼 길을 달려 온 자기에게 하는 말인가 하고 속으로 성이 나고 실망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리고 일어서 나가려고 하자 스님은 기왕 예까지 오셨으니 차(茶)나 한잔 하고 가라고 권하였다. 맹사성은 스님의 만류에 못 이겨 다시 자리에 앉았다. 스님은 맹사성에게 차를 따라 주는데 찻잔에 찻물이 그득해 졌는데도 계속하여 물을 따라 찻물이 계속 넘쳤다. 맹사성은 스님이 모르는가 싶어서 찻물이 넘친다고 지적했는데도 스님은 계속하여 찻물을 따르면서 화가 난 음성으로 맹사성에게 일갈하였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이 젖는 것을 알면서 어찌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하게 하는 것을 모르십니까”하고 꾸짖었다. 맹사성은 이 말을 듣고서야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인사를 하고 황급히 돌아서 방문을 나가려다가 그만 문틀에 이마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러자 스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일이 없지요”라고.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세종 13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황희(黃喜 1363-1452), 권진(權軫 1572-1624)과 함께 조선 3대 청백리로도 이름을 남겼다. 그는 황희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율(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했다. 세종(世宗) 3년 태종의 재위 18년간의 실록인 태종실록(太宗實錄) 36권 35책을 찬수(撰修)하였고, 세종이 한번 보자고 하였으나 왕(王)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고 전한다. 세종 14년에는 우리나라 지리책인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하였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다.

평소 하인이나 노비에게는 관대하였으나 중요 직책의 사람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으며, 김종서(金宗瑞)의 장수로서의 자질을 알아본 그는 김종서의 사소한 잘못도 엄하게 다스렸다. 그 뒤 김종서를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천거한 뒤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하기도 했다. 당시 관료들은 북방의 여진족(女眞族)에 대해 정벌보다는 현상유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필요에 따라 여진족에 대한 회유와 정벌을 병행하면서 주도면밀한 전략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좌우정이었던 맹사성은 영의정 황희와는 달리 세종의 여진정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이 작전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실천한 과단성 있는 전략가이기도 했다. 여진 정벌 후 맹사성은 모든 공을 최윤덕(崔潤德)장군에게로 돌려 그를 자기의 자리인 좌의정에 승진시켜줄 것을 건의하니, 세종은 그를 우의정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겸손(謙遜)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였다.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고 한다.

맹사성은 젊어서 스님으로부터 깨달은 바 있어 사람됨이 소탈하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가 늘 풍족치 않고, 늘 식량은 녹미(祿米-정부미)로 하였고, 당시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은 맹사성의 상관으로 그의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 매번 그의 집을 오고 갈 때는 그 집 앞에서 말을 내려 지나갔다고 한다. 맹사성은 바깥출입을 할 때에는 소타기를 좋아해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줄을 알지 못하였고, 지방 순회 시에도 소를 탄 재상을 지방 수령(守令)이 알아보지 못하고 야유(冶遊)를 보내다가, 뒤에 알아본 후 도망치다가 수령의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려 후에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처럼 지혜로우면서도 청렴결백(淸廉潔白)한 맹사성의 성품은 요즘 사람들에게 더욱 귀감(龜鑑)이 되어야 할 덕목이라 하겠다.

맹사성이 처음 관료가 되어 부임한 파주에는 조선의 최장수 재상인 황희 정승이 지었다는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정자(亭子)가 있다. 이 정자에는 “물러나 강호에서 여생을 보낼 적에는 자연스럽게 갈매기와 같이 세상을 잊고 높은 벼슬은 뜬 구름처럼 여겼으니, 대장부의 일로 그의 탁월함이 이와 같아야 하겠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대왕이 겨레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데는 그만큼 훌륭한 재상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찻잔의 물이 넘침같이 지식이 오용이 넘치고, 겸손은 남의 일로 치부하고, 그 자리를 보존하려고 온갖 술수가 횡행하고, 소신과 관용의 리더십을 갖춘 인재를 보기 어려운 세상에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는다.”라는 평범한 진리가 20-50클럽에 진입한다는 시점에서 우리의 인격과 국격을 살피는 계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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