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전기 작가인 앤서니 셸던은 그가 쓴 영국의 전 총리 토마스 블레어의 회고록 ‘여정’(A. Journey 2010.9.1)에서 “블레어는 총리 취임 때만 해도 모든 영국인들의 친구였지만 퇴임 때는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블레어는 세계적 극소수의 정치인중의 하나로 “영국은 처칠과 대처, 그리고 블레어를 갖고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일제 강점기 지주의 딸로 태어나 2층 양옥집에서 호사를 누리고 살다가 어느 날 부친이 첩자 누명을 쓰고 갑작스럽게 타계하자 판잣집 신세로 전락하였고, 1950년 한국전쟁이 나자 미군부대에서 오르겐 연주로 생계를 꾸리다가 베트남의 사이공 소재 나이트클럽 생활 중 미군 종군기자를 만나 결혼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백악관에서 제럴드 포드 전 미대통령과 춤을 춘 신디(한국명 송영희)씨의 극과 극을 달려온 파란 만장한 삶을 담은 그의 회고록 ‘신디, 오 신디’(미국명. Bamboo Heart 대나무의 마음)가 발간되었다.

신디 씨는 외아들에게 한국인 어머니의 대쪽 같은 성품과 어머니의 고향인 한국의 뿌리를 알려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을 갖고 회고록을 냈다고 한다. 불교계의 혜승(慧僧) 송월주 스님의 회고록 ‘나의 삶 나의 길’에는 종정이셨던 성철 스님의 저서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깨달음과 관련해 돈오점수(頓悟漸修. 깨친 후에도 계속 닦아야 한다)를 정면을 비판하며 돈오돈수(頓悟頓修. 깨달은 뒤에는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다)를 주장하여 불교계에 토론의 불을 지폈다 한다.

한편 지난 12월 초 한국 원양어업의 원로 수산인인 인성실업의 박인성 회장도 ‘시련과 도전 30년’에서 시련은 있어도 도전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회고록을 냈다. 회고록 발간에 즈음하여 보내 온 전 고대 홍일식 총장의 격려의 글 한 구절에는 “그가 갈아온 인생역정을 어찌 성공의 기쁨과 영광뿐이라고 하겠는가, 남들이 존경하고 놀라고 부러워하는 그 성공 뒤에는 누구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울었을 또 하나의 그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회고하는 가운데 격동의 한 해가 지나고 임진년(壬辰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한편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 겸 전략가로 명성이 높았던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후한(後漢)말의 전란을 피하여 출사(出仕)하지 않고 은둔하였으나, 207년(건안 12)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荊州)에 와 있던 유비(劉備)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水魚之交)에 비유하였다. 제갈량은 유비가 세 번이나 찾아 준 것에 감동하여 그를 도왔고, 유비 사후에도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한(漢)황실의 부흥을 꾀하였다. 제갈량이 위(魏)를 정별 하려고 출병하면서 후주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가 있다.

그는 이 글에서 국가의 앞날을 생각하여 유선에게 군주의 안일을 경계하고 신하의 충간을 잘 들으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출사표는 전. 후 두 편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전 출사표를 말한다. 그리고 후 출사표도 제갈량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실은 위작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전 출사표에는 제갈량의 국가와 주군(황제)에 대한 충성과 걱정이 전편에 묻어나 있다.

“지금 천하가 삼분(위. 촉. 오)되었는데, 익주(쓰찬성 일대)의 백성들이 지치고 국력이 피폐하니 이는 진실로 나라의 존망이 달린 위급한 시점임으로 임금을 모시고 호위하는 신하가 궁궐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러운 뜻을 가진 군사들이 밖에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선제(유비)의 각별한 대우를 생각해서 지금의 폐하께 보답하려고 하려는 것으로 망령되이 스스로를 덕이 없다고 경시하고 충성스럽게 간언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되며, 궁중(宮中 황실)과 부중(府中 승상부)은 모두 일체이니 공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고 잘못한자를 벌주는 것을 차이가 나도록 해서는 안 될뿐더러 만약 부정한 짓을 저질러 죄를 범한 자와 충성스럽고 선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마땅히 법을 다스리는 관리에게 맡겨서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공평하고 밝으신 다스림을 밝혀야 한다”고 진언하고 또한 “개인감정이나 사리에 치우쳐 안팎에서 법을 다르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직언하고.(중략) “신은 본래 평민으로서 남양 땅에서 직접 밭을 갈았고, 구차하게 어지러운 세상에서 생명을 보존하면서 제후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게도 몸을 굽히시고 초가집으로 신을 세 번이나 찾아오셔서 신에게 당세의 일을 물으셨습니다.(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이 때문에 저는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께 힘껏 뛰어다닐 것을 허락했습니다.(후략) 이제 먼 길을 떠나게 되어 표문(表文)을 쓰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맺고 있다.

제갈량(공명)은 이렇게 후주를 보좌하여 한 왕실의 부흥을 꾀하였고 뛰어난 전략에도 불구하고 오장원(五丈原)의 진중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임진년 새해 우리 수산분야에 유가 급등과 FTA 영향으로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 혜안을 가진 많은 분들이 수산분야에 출사(出仕)하고, 정책 입안자는 훌륭한 출사표(出師表)로 불확실성과 격랑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대안들로 수산인들에게 약속하고, 수산인 들도 밴댕이 속같이 자기 눈의 대들보는 놔두고 다른 사람의 눈에 티끌만을 보지 말고, 지혜는 보태고 고통은 나누어 수산업의 밝은 미래를 계획하는 새로운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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